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 - 한정호가 질 수밖에 없는 이유

까칠부 2015. 3. 4. 03:21

과연 '그까짓 돈'이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스케일부터가 다르다. 17억 5천만원. 아마 평생 벌어서 그 근처도 가지 못하는 사람이 이 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딸 역시 굳이 결혼시키지 않더라도 미혼모인 채로도 아이와 함께 평생 풍족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더 비참한 것일 게다. 부모가 되어 감히 딸의 행복을 돈으로 바꾸려는 마음을 먹었었다는 사실이.


그러고 보면 드라마에서도 비참할 정도의 가난은 찾아보기 힘들어진지가 꽤 되었다. 한정호(유준상 분)의 집과 비교해서 그렇지 서봄(고아성 분)의 집 역시 현실에서 그다지 가난한 축에 든다고 보기는 어렵다. 딱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한 정도에 불과하다. 그 이하가 되면 서봄의 언니 서누리(공승연 분)의 하소연처럼 시청자가 바라는 때깔 좋은 연출을 보여주기가 무척 힘들어진다. 삶에 치이고 현실에 짓눌려 하루하루 견디는 것조차 버거운데 거기서 무슨 재미를 찾고 감동을 찾겠는가 말이다. 17억 5천만원이라는 상상하기도 힘든 돈을 단지 딸의 행복을 위해 포기해야만 한다. 차라리 그냥 그 돈을 받아 서봄과 아이와 함께 자기들끼리 돈걱정없이 한 번 살아봤으면 좋겠다. 솔직한 진심이다.


하기는 그래서 드라마의 시청률도 상당히 저조하게 나오고 있는 것일 게다. 일단 보기가 불편하다. 기껏 대한민국 최고의 로펌을 이끌고 있는 대표의 집인데 화면이 너무 어둡다. 그 화려함이나 호사스러움을 즐길만한 여지가 별로 없다. 아무리 부와 권력이라는 것이 진짜 행복을 약속해주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들이 누리는 일상 만큼은 현실을 잊게 만들 정도로 사치스러워야 한다. 꿈을 꿀 수 있어야 한다. 대리만족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나른하고 권태롭고 답답하다. 그들이 느끼는 그대로 그들을 옭죄는 그들만의 구속과 억압이 영상을 통해 시청자들에게까지 보여진다. 그것은 또다른 현실이다. 가식이고 위선일지언정 세련된 품위와 격조가 느껴지는 한인상(이준 분)의 부모에 비해서도 서봄의 부모들은 구질구질할 정도로 솔직하고 직설적이다. 한정호에게 따지려 그의 사무실까지 찾아가지만 냉대조차 없이 철저한 무시속에 밖에서 떨다가 힘없이 집으로 돌아가고 만다.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 힘없는 이들의 악다구니에 불과하다. 누구도 감동시키지 못한다. 초라하고 무력하다.


어차피 오래가지 못한다. 그 돈이라도 받고 헤어지게 하는 것이 낫다. 한정호의 집 고용인들은 아무래도 서봄의 편이다.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아이까지 낳고 엄마가 되었다. 아빠가 바로 옆에 있다. 역시 어린 나이지만 엄마와 아이에 대한 책임감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현실을 인식한다. 고용인으로서 분수를 지키라는 말에 현실적인 위협까지 느낀다. 누구의 편도 아닌 단지 돈을 주는 사람의 편이다. 그보다 더 냉엄한 현실이 어디에 있을까? 그들의 진심과 그들을 둘러싼 현실이 지독한 부조화를 만들어낸다.


한인상을 사법고시에 합격시키려 고용한 과외선생마저 어느새 한인상의 진심에 설득당하고 만다. 인간의 정과 현실의 벽, 인간의 진심마저 왜곡시키는 현실의 무서움과 현실의 단단한 벽마저 허물어뜨리는 진심의 무거움, 그리고 한인상의 무모함은 마침내 아버지 한정호마저 뒤로 한 발 물러서게 만든다. 과외선생과는 다르다. 한인상의 진심에 감동하거나 설득되어서가 아니다. 그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었기 때문이었다. 한정호의 냉정한 이성이 한인상에 대한 분노마저 억눌러 버린다. 그는 항상 최선만을 선택한다.


여전히 드라마가 흥미로운 이유일 것이다. 한정호 역시 다른 부패한 기득권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인물이다. 부정과 편법을 마다하지 않고,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 또한 가리지 않는다. 자신의 로펌에 소속된 인사를 총리로 올리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로펌에 대한 부정적인 기사를 막기 위해서, 그는 냉정한 수완가로서의 자신의 본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서봄의 부모에 대해서도 그들과의 사회적인 거리 만큼이나 철저히 거리를 유지하며 조금의 여지도 허락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야말로 모범적인 상류시민의 모습일 텐데, 정작 한인상과 서봄에게는 여지없이 무너지는 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만다. 


바로 한정호 자신이 필사적으로 지키려 하는 원칙, 그 자신의 모순적인 허위와 위선 때문이었다. 결코 명분을 잃지 않으려는 그의 완고한 고집이 오히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목적만을 이루려 하는 한인상과 서봄으로 인해 여지없이 흔들리고 만다. 한인상과 서봄은 그저 올곧은 것 뿐이다. 아직 어린 만큼 다른 계산 없이 오로지 자신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한 가지만을 바라보는 것 뿐이다. 한정호가 지키려 하는 형식적인 명분과 그들의 더 간절한 진심이 충돌하고 마는 것이다. 만일 한정호가 위선을 포기하고 자신의 진심을 솔직하게 드러내려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오히려 그런 드라마는 흔하다. 그래서 더 재미있다. 한정호는 어떤 순간에도 자신이 내세운 원칙, 위선과 허위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통쾌하다.


한심할 정도로 소심하고 나약하면서도 자신의 여자와 아이를 지키는데 있어서는 누구보다 단호하고 과감한 한인상의 모습이 인상깊다. 매번 울먹이며 말할 때는 이보다 한심해 보일 수 없는데, 그러면서도 결코 자신이 지켜야 할 바를 양보하거나 타협하지 않는다. 하기는 아무런 근심걱정 없이, 아무것도 포기하거나 체념할 필요 없이, 그저 사랑만 받고 자라온 이이기에 가능한 낙천이고 긍정일 것이다. 부모가 서봄과의 사이를 반대하니 아무 대책없이 서봄과 나가 함께 살 생각부터 한다. 무엇을 어떻게 해서 서봄과 살아갈지 고민도 궁리도 전혀 하지 않는다. 원하는 대로 될 것이다. 한정호가 자식을 잘 가르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서봄의 엄마 김진애(윤복인 분)처럼 한심한데 어쩐지 응원해주고 싶어진다.


이준의 찌질할 정도로 한심한 연기가 그래서 눈길을 잡아끈다. 그다지 눈에 띄는 화려함이나 대단함은 없지만 오히려 드라마에서는 조금은 존재감 없는 모습이 어울린다. 결국 모든 결정적인 순간은 한인상을 중심으로 모이게 된다. 그에 비하면 고아성이 연기하는 서봄은 그저 한결같다. 아직은 2회에서 자신을 비난하는 한인상의 어머니 최연희(유호정 분)에게 소심하게 항변하던 모습 이상은 보여주지 못한다. 워낙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주역은 그들이 아닌 한인상의 부모 한정호와 최연희인 때문이다. 아직 무언가를 결정하기에는 어린 나이이기도 하다.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흐트러지거나 들뜨지 않는다. 충분하고도 넘친다.


이 사회의 법과 정의마저 마음대로 주무르는 대형로펌의 대표가 고작 성인도 안된 아이들에게 제멋대로 휘둘리는 모습이 자못 통쾌하기도 하다. 밖에서는 온갖 협잡을 일삼으면서도 아이들에게는 그저 약한 모습만을 보인다. 그럼에도 억지로 되돌리려 하기보다 자기만의 정도로써 아이들을 상대하려 한다. 밉지 않은 이유다. 아이들이 결국 이기게 될 것이다. 한정호와 최연희는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과정이 궁금하다. 웃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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