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착하지 않은 여자들 - 정마리가 대신 전한 인사, 죄의 이유

까칠부 2015. 3. 6. 03:12

너무나 가난했다. 그래서 그 가난에서 벗어나야 했다. 자신마저 수단으로 삼아야 했다. 팔 수 있는 것은 다 팔았고,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다 이용했다. 자식이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부모의 필요에 의해 자식의 일생마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부모가 정해놓은 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서는 안되었다. 자식은 개인이 아닌 부모의 소유물이었다.


이해시키기보다 윽박질렀고, 타이르기보다 채찍을 들었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가차없이 버렸다. 그럴 준비도 능력도 갖추지 못한 아이들마저 함께 데리고 가기에는 너무나 기약없이 서둘러야 하는 길이었다. 아이들이란 원래 그런 것인데. 보이는 모든 것이 신기하고, 들리는 모든 것이 흥미롭다. 그렇게 세상을 배워간다. 그렇게 한 사람의 인간으로 성장해간다. 기다려주지 못한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할 그 나이에 인기스타에 열광하는 것이 무엇이 그리 크게 잘못인가. 어른들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기에 바로 그 스타들로부터 위로를 받는다.


하필 강순옥(김혜자 분)이 남편을 떠올리며 홀로 생각에 잠겨있는데 조영남이 번안해 부른 '딜라일라'가 흐른다. 모두가 죽었다고 여기고 있는 김철희(이순재 분)가 기억을 잃은 채 머물고 있는 요양원에서도 이글스의 '호텔 캘리포니아'가 연주되고 있었다. 아마도 강순옥 자신이 젊었을 적 즐겨듣던 노래였을 것이다. 어쩌면 김철희가 잃어버린 기억의 어딘가 이글스의 '호텔 캘리포니아'와 만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단지 조금 더 과감하고 과격했을 뿐이었다. 그만큼 자신의 감정과 욕구에 솔직해진 때문이었다. 시간이 흐르면 그 열정들마저 어느새 식어 하나의 추억으로만 남게 된다. 그런데 그것을 채찍질하는 것이 그리도 급했던 것일까?


어른들 세대로부터 들었던 클리프 리처드와 레이프 가렛은 조금 달랐다. 그때 그 소녀들이 이제는 어엿한 애엄마가 되어 있을 텐데 지금 그때 자신들의 행위를 돌아보면 어떤 기분일까? 철없던 시절의 일탈이었다. 지나고 나면 후회하게 될 행동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리 바로잡아준다. 오히려 그런 자신들의 선한 의도를 몰라주는 어린 세대가 야속하기만 할 따름이다. 그러나 과연 그 소녀들로 하여금 후회하게 만드는 것은 누구인가? 엄마가 된 소녀들 자신인가? 아니면 후회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어른들이 만든 세상의 규범이고 질서인가. 정작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느냐고 묻는 김현숙(채시라 분)의 질문에 나현애(서이숙 분)는 아무 대답도 주지 않고 있었다. 아직도 김현숙은 그것이 어째서 잘못인가 납득하지 못한다.


시대가 바뀌었다. 아니 과연 바뀌기는 한 것일까. 아이가 아이답지 않음을 걱정한다. 어른이 어른답지 않음을 근심한다. 무엇이 아이다운 것이고 무엇이 어른다운 것인가. 자신들이 만든 틀에 개인을 끼워맞추며 그 의도에서 벗어난 이들을 서슴없이 비판하고 비하한다. 올바른 세상을 위해서. 더 많은 부와 더 큰 성공을 위해서. 내일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자는 게으르다. 오늘을 즐기려 하는 자는 타락해 있다. 무엇을 위한 부이고, 무엇을 위한 성공인가. 여전히 부와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거머쥐고 나서도 나현애는 내일을 위해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 어쩌면 그것만이 나현애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일 것이다. 다시 한 번 초라하고 궁색한 김현숙의 모습을 통해 자신이 옳았음을 확신하게 된다. 김현숙은 이솝우화의 배짱이처럼 철저히 도태되었다.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다.


김현숙을 짓누르던 현실은 이내 그녀의 딸인 정마리(이하나 분)에 대한 억압으로 유전된다. 자신은 실패했기 때문에. 자신은 패배했기 때문에. 자신은 낙오되고 도태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딸만이라도. 아직도 사랑하는 남편 정구민(박혁권 분)마저 그 과정에서 소외되고 말았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알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되었는가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저 못난 자신을 학대하면서 갈 곳 없는 마음을 달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진짜 김현숙 자신의 바람이었는가. 딸이 박사가 되고 교수가 되어서 보란듯이 사는 것이 그녀의 인생을 걸어야 할 만큼 가치있는 일이었는가. 오히려 강의가 폐지되고 실업자 신세가 되면서 비로소 정마리는 해방감과 함께 행복이라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다. 공부만이 살 길이라고 지금을 포기한 채 내일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여전히 달리고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한 이야기다.


그녀들을 좌절케 하는 것들. 그래서 그녀들을 억압하고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어째서 '착하지 않은' 여자들인가. 착하다는 것은 세상에 순응하는 것이다. 세상이 만든 질서에 저항않고 복종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나현애같이. 나말년이라는 자신의 이름마저 세상이 바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세상이 바라는데로 불필요한 아이들을 솎아내며 필요한 아이들만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리고 모든 것을 가졌다. 그녀를 비난하던 학생들마저 그녀의 부와 명성을 따라 그녀의 주위로 다시 모인다. 과연 누가 착한 여자이고 착하지 않은 여자일까? 김현숙의 언니 김현정도 나이를 이유로 방송가에서 밀려나려 하고 있다. 남자의 나이는 오히려 경륜으로 여겨지지만 여자의 나이는 때로 죄가 되기도 한다. 그녀는 어떻게 세상에 반역을 일으킬까.


그렇게 속정이 깊으면서 한 편으로 자신의 감정에도 충실하다. 장모란을 염려하다가 기회만 되면 어떻게든 그녀를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한다. 그러면서도 딸 김현정이 장모란에게 무어라 하는 것은 참아내지 못한다. 장모란에 대한 연민이 같은 여성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라면, 장모란에 대한 증오는 자신의 남편을 빼앗아간 상대에 대한 감정이었을 것이다. 굳이 둘 사이에 구분을 두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운 인간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계량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그대로 마음가는대로 자신을 맡긴다. 선량하면서 독하다. 악한 게 아니다. 독하다. 김혜자의 연기는 감히 소름이 돋을 정도다. 웃고 울며 인간의 감정을 모조리 느끼게 한다.


단 한 사람이어도 좋았다. 김현숙이 그 기사를 읽을 수 있었으면. 혹은 아무라도 김현숙에게 그 기사의 존재를 알려주었더라면. 뒤늦게나마 딸 정마리가 그 아들 이두진(김지석 분)을 찾아가 대신 감사의 말을 전한다. 아무도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누구도 그녀의 편이 되어주지 않았다. 혼자서 세상의 정의와 맞서싸워야 했다. 그 공포와 절망감을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여전히 그녀는 자신에게 자신이 없다. 모두로부터 부정당했다. 세상의 모든 것들로부터 부정당했다. 그래도 한 사람 친구는 그녀의 곁에 남아 있다. 유일한 행운이다. 더 비참한 처지에 있는 이들도 얼마든지 있다. 친구 안종미(김혜은 분)가 그래서 픽션이더라도 정말 고맙다. 


그러면서도 굳이 일부러 메시지를 강조하거나 하는 법은 없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내버려둔다. 오히려 정마리를 중심으로 모여드는 젊은 인연들이 흥미롭고, 강순옥과 장모란의 비일상적인 상황이 재미있다. 김현숙과 나현애와의 오랜 악연이 어떻게 이어질 것인가 짓궂은 기대마저 생긴다. 죽었는 줄 알았던 사람이 사실은 살아있다. 정마리에게 다가서는 남자 가운데 하나인 이두진은 김현숙과 악연인 나현애의 아들인 동시에 유일하게 김현숙의 편을 들어주었던 기자 이문수의 아들이다. 이두진에게 막내할아버지인 이문학이 김현정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 그 자체로도 재미있다. 어쩌면 학창시절 김현숙이 자신의 장기라 말했던 글쓰기가 이문학과 김현정의 만남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나현애도 소설을 쓰려 하고 있다. 과연 앞으로 이야기는 어떻게 전개되어 갈까?


과연 그동안 흐트러진 모습만을 보여주다가 제대로 꾸미고 차려입고 나니 시간을 거슬른 듯한 모습이었다. 하기는 도지원을 보면서는 잠시 시간을 잊고 있었다. 팬이었었다.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아름다운 두 배우를 지켜보는 것도 드라마를 보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굳이 영상이어야 하는 것은 눈으로 보고 즐기라는 것이다. 암울하지만 꺾일 수 없는 의지가 있다. 인간은 행복해지기 위해 산다.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 인간은 살아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존엄이며 본능이다. 전율할 듯한 무게감일 것이다.


기대했던 이상으로 빠져드는 것을 느낀다. 여성이 아니기에 같은 여성으로서 느끼는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 다만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상업드라마의 문법에 충실하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메시지를 어색하지 않게 전하는 그 노련함에 감탄한다. 뻔한 이야기같지만 그러나 그 방식은 흔하지 않다. 자신도 모르게 마음을 울리는 것이 있다. 진짜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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