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자기 이외의 존재란 대상, 즉 객체로서만 존재하게 된다. 객체는 사물이며 인식이란 관계다. 본질은 곧 개연성이다. 오로지 주체로서 자신만이 모든 것을 경험하고 판단하고 정의할 수 있다. 다른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심지어 주체인 자신마저도 철저히 대상화된 객체로써 인식하고 판단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결국 인간의 의식이 닿을 수 있는 한계일 것이다.
돌은 단단해야 한다. 얼음은 차가워야 한다. 의자는 사람이 앉을 때 쓰는 것이다. 책상으로 쓰기 위해서는 평평하고 넓어야 하며 높이 또한 적당해야 한다. 폭신한 돌은 돌이 아니다. 따뜻하고 물처럼 흐른다면 그 역시 얼음일 수 없다. 앉을 수 없는데 의자일 리 없다. 울퉁불퉁한데다 높이도 너무 높은데 책상으로 쓸 수 있겠는가. 남자는 남자다워야 하고 여자는 여자다워야 한다. 남자인데 여자같고, 여자인데 남자같다. 아직 아이인데 전혀 아이같지 않다.
그러고보면 이번주 SBS의 월화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에서도 의미심장한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자기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한 고용인들에 대해 고용주인 최연희(유호정 분)는 두려움마저 느끼고 있었다. 낯설다. 부조리하다. 최연희의 세계에서 고용인들이란 단지 자신이 지불하는 댓가를 바라고 시키면 시키는대로 따르는 객체에 불과했었다.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주체가 아니었다. 얼마간의 댓가를 더 약속해주면 그만큼 더 헌신하고 최선을 다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주체로서 스스로 행동에 나서는 고용인들을 보게 되었다. 차라리 이 모든 일들의 원인을 며느리 서봄(고아성 분)에게 돌리고자 한다.
하기는 큰아들 한인상(이준 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장차 한씨집안의 모든 것을 물려받게 될 후계자였다. 그에 어울리는 자질과 자격을 갖출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한정호(유준상 분) 부부는 그동안 최선을 다해왔었다. 한인상 역시 단 한 번도 부모의 뜻을 거스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 한인상이 어느 순간 아버지와 맞서려 하고 있었다. 자신만의 기준으로 아버지와 아버지의 행위를 비판하며 그에 도전하려 하고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토록 순종적이던 아들이 - 더구나 자신들의 모든 것을 물려받아야 할 후계자가 본분을 저버리고 자신들을 거스르려 하고 있었다. 차라리 서봄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고 싶은 것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 일어나버린 때문이었다. 믿을 수 없었다.
아이는 아이다워야 한다. 동심은 순수하고 아름다워야 한다. 누가 그런 것들을 정했는가? 아이들답게 오로지 밝고 따뜻하고 즐거운 이야기들만을 들어야 하고, 반드시 해야만 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그래서 비틀리고 찢기고 바스라지는 동안에도. 그것은 바람이기도 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 전혀 아무렇지 않았다. 여전히 아이다운 모습으로 있는 아이들의 존재는 그 강력한 증거일 것이다. 어느 아이도 자신들로 인해 다치거나 상처입지 않았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행위는 잘못되지 않았다. 아이들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그렇게 어느새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아이다울 것을 강요하기 시작한다. 아무리 아프고 힘들어도 아이들은 아이인 채로 있으라. 아이들의 동심이 어른들의 액자에 넣어진다.
하필 그와 관련한 내용의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었다. 김현숙(채시라 분)의 담임선생님이던 나말년(서이숙 분)은 그러나 전혀 김현숙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었다. 다른 아이들과 너무나 다른 김현숙의 개성을 오히려 혐오하고 멸시했으며 끝끝내 학교로부터 배척하고자 했었다. 학생은 학생다워야 한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다. 하지만 과연 누가 그런 것들을 정했을까? 학생이기 이전에 한창 감수성 예민할 나이인 10대였다. 동경하던 스타의 공연을 보다가 얼마든지 감정이 격해질 수 있는 것이기도 했었다. 그런데 언론까지 동원되어 김현숙의 행동을 문제삼아 심지어 세태를 비판하는 기사까지 써낸다. 학생이 학생답지 않았다. 결국 김현숙은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무려 30년 동안이나 자신의 가능성을 억누르며 살아야 했었다.
조금 불만도 있었다. 너무 잘나간다. 못하는 것 없이 만능이다. 요리는 엄마 강순옥(김혜자 분)의 수제자인 박은실(이미도 분)이 열등감을 느꼈을 정도고, 장사수완이며 사람 대하는 것 역시 가게를 운영하는 안종미(김혜은 분)를 넘어서고 있었으며, 청소년상담 자원봉사도 어느새 자발적인 '선생님' 소리까지 듣고 있었다. 그래도 박은실보다 많은 것을 가졌으니 절박함도 덜할 것이다. 아마 세상사람 가운데 김현숙보다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은 매우 드물 것이다. 하지만 그래야 했으니까. 도대체 나말년과 세상의 섣부른 편견이 얼마나 대단한 재능과 가능성을 묻어버리고 말았는가. 공부만 하는 것이 학생은 아니다. 공부를 잘하는 것만 좋은 학생이 아니다. 어른들이 기대하는 동심을 들려주지 못했어도 어린이는 어린이다.
문제가 된 동시를 읽어 보았다. 참혹했다. 시의 내용이 아니라 그같은 시가 쓰여지도록 만든 아이의 현실이 너무나 참혹했다. 아이가 바라서가 아니었다. 아이가 하고자 해서가 아니었다. 아이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부모는 자신의 기대와 바람으로 아이를 학원으로 내몰고 있었다. 현실의 부자유한 억압과 고통이 그 원인을 제공한 부모에 대한 증오로 표출된다. 직접 행동으로 옮기지 않더라도 아이의 원망으로 인해 아이의 안에서 부모는 조금씩 죽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어느 순간 더 이상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전같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경고다. 그만큼 처참한 현실에 자신은 둘러싸여 있다. 아이들의 언어였다. 아이들의 사유였다. 그러나 그 형식이 아이답지 않고 잔혹하다는 이유만으로 그 내용마저 외면하려 한다. 어째서인가?
결국 동시집을 전량 회수해서 폐기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아직까지도 인터넷은 그와 관련하여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심지어는 시를 쓴 어린이 자신에 대한 인신공격성 발언들도 적잖이 보이고 있다. 나말년만이 유독 특별했던 것은 아니었다. 김현정(도지원 분)의 기획처럼 누구나 하나씩 그와 비슷한 기억들을 가지고 있다. 노골적인 조롱과 가차없는 비난, 그렇게 자신감을 잃고 자신을 내려놓게 만든다. 어쩌면 평범할 수 있는, 더구나 대중의 선의에 의해서 또다시 김현숙은 세상에 나오고 만다. 아이다운 아이가 되라. 아이다운 시를 쓰는 아이가 되라. 아이답게 동심을 가진 아이가 되라. 그것은 원래의 자신과 거리가 멀 것이다. 김현숙이 원래의 자신을 찾기까지 3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에게 어울리는 시가 따로 있다. 아이들이 읽기에 적당한 동시가 따로 있을 것이다. 밝고, 따뜻하고, 즐거운, 순수하고 아름다운 동심을 담은 좋은 시가. 아이의 언어였다. 아이의 현실이었다. 스스로 고민하고 궁리한 자신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아이는 강제로 어른이 된다. 어린이를 위한 동시가 아니었다. 동심을 묻는다. 숙제다.
http://www.stardail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8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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