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이 인정마저 넘어선다. 개인이 아니다. 송파마방에 생계를 걸고 있는 사람만 무려 87명이다. 아무렇지 않은 말 한 마디 몸짓 하나에도 딸린 가족까지 무려 수백이 넘는 사람들이 영향을 받는다. 잘못된 판단 하나에 그 모든 사람들이 길바닥에 나앉을 수도 있다. 자기만 잘한다면 그 몇 배의 사람들도 얼마든지 책임질 수 있다. 오로지 자기 할 몫이다.
가족도 없다. 친구도 없다. 사생활도 없다. 아니 개인이라는 자체가 사라진다. 리더이기에 겪어야 하는 고독이며 시련이다. 리더이기에 짊어져야 할 책임의 무게다. 차라리 자신의 손을 자른다. 그만한 고통이다. 평생을 함께 해 온 아내이고 의동생이다. 책문에서 우피밀매를 하던 시절부터 온갖 궂고 힘들 일들을 함께 겪어 온 동지들일 터다. 하지만 그 이전에 자신은 송파마방의 쇠살쭈다. 송파마방에서 일하는 모두의 삶과 송파마방과 거래하는 모두의 이익이 오로지 자신의 손끝에 달려 있다. 용서하고 싶다고 용서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과거 천오수도 친형제와 같았던 길상문을 자신의 손으로 찌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전근대였을 것이다. 개인의 신용을 담보할 수 있는 어떤 구조도 장치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설사 있더라도 너무 허술해서 틈이 많았다. 기댈만한 것이 못되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개인의 의지를 담보로 삼아야 했었다. 행동으로 자신의 결심과 각오를 보여주어야 했었다. 이렇게까지 할 수 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만에 하나 약속을 어기게 된다면. 형제같던 이를 죽이고, 가족의 피를 손에 묻힌다. 자신의 손마저 잘라낸다. 그렇게까지 해가며 지키고자 했던 것이 장사치로서의 양심이었고, 객주인으로서의 책임이었다. 울면서도 끝끝내 의동생 송만치(박상면 분)의 남성을 자신의 손으로 잘라낸다.
그 각오를 본다. 그 다짐을 본다. 그 속에서 그토록 원망했던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본다. 천오수로부터 건네받은 유산을 마침내 그 아들 천봉삼(장혁 분)에게 온전히 돌려줄 수 있었다. 천오수로부터 받은 가르침이 지금의 자신을 있게 했듯, 지금 자신이 전하는 가르침이 천봉삼이 자신만의 길을 찾는 계기가 되어 줄 것이다.
하기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토록 객주인이 되기를 거부했었다. 송파마방의 쇠살쭈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 책임의 무게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 인정마저 저버려야 하는 잔혹하고 가혹한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갈 자신이 없다. 하지만 그래야 함을 안다. 혼자만 편하려 해서는 안되는 것을 안다. 그러나 다만 아직은 마음의 준비가 다 끝나지 않았다. 길을 열어준다. 자신의 길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조성준은 과연 어른이다. 천봉삼에게는 천봉삼의 길이 있다. 단지 그것을 지켜보며 기다린다.
선을 넘는 순간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될 것이다. 개똥이(김민정 분)가 길소개(유오성 분)를 떠나보내며 마지막 건넨 인사는 예언이었을 것이다. 책임의 무게를 알지 못한다. 견디고 인내하는 것도 전혀 익숙하지 않다. 쉽게 유혹에 빠지고 쉽게 충동에 휘둘린다. 그렇게 개똥이를 걱정하다가도 육의전 대행수라는 말에 바로 혼자서 길을 떠난다. 발뒤꿈치가 잘리고 남성을 잘린 두 남녀의 참혹한 모습에 훔치던 돈의 일부를 돌려준 것이 바로 자신의 가치였을 것이다. 송파마방과 김학준 사이의 다툼에 개입하려 한다. 어쩔 수 없는 악역이라는 것이 새삼 개똥의 예언을 안타깝게 만든다. 역설적으로 어쩌면 그것이 천봉삼의 개입으로 틀어질 수 있었던 천소례(박은혜 분)의 계획을 돕게 될 지 모른다.
자신만의 길이 있다. 김학준에게도 넘어서는 안되는 자신만의 원칙이 있다. 어지간한 일에는 낯빛조차 바뀌지 않고 태연히 자기의 손익부터 계산하고 보던 얄밉도록 넉살좋던 장사꾼이 사람을 시켜 줬던 돈을 다시 빼앗아갔더라는 말에는 당황한 표정부터 짓고 있었다. 도저히 견딜 수 없다.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아무리 자신이 탐욕스럽고 남에게 못된 짓을 많이 했어도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었다. 자존심이다. 자신의 존엄이다. 그것만큼은 어떻게든 훼손당하고 싶지 않다. 알량하지만 바로 그것이 김학준의 길일 터다. 자신만의 길이 있다.
개똥이의 과거가 비로소 나온다. 조언이 아니라 예언이었다. 우연이 아닌 예지였다. 운명처럼 천봉삼과 만난다. 이런 때 홈페이지의 인물소개는 오히려 방해가 된다. 조서린(한채아 분)도 신석주(이덕화 분)와 만나게 된다. 자신이 의도한대로 김학준을 찾아와 도끼부터 휘두른 조성준으로 인해 천소례도 미처 알지 못했던 그날의 진실의 일부를 엿듣게 된다. 천소례가 의도한대로 송파마방의 조성준과 김학준이 부딪히는 과정에 강경으로 뒤쫓아 올라온 길소개가 끼어든다. 운명은 그렇게 천봉삼에 이어 천소례에게로 길소개를 이끈다. 아직 천소례는 모든 진실을 듣기 전이다. 천봉삼이 개똥이와 함께 다시 그 뒤를 쫓는다.
어쩌면 이것이야 말로 조성준이 송만치가 아닌 천봉삼을 다음 쇠살쭈로 결정한 이유였을 것이다. 책임의 무게를 모른다. 여전히 조성준 자신의 의동생인 송만치일 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쉽게 잊는 사실을 터다. 다른 사람의 위에 선다는 의미다. 다른 사람의 앞에 선다는 의미다. 그만큼의 책임이다. 그만큼의 고뇌이고 고독이다. 고통이며 인내다. 오로지 쉽게 자신의 손에 쥐어진 것들만을 누리려 한다. 천봉삼과 길소개가 앞으로 대립하게 된다. 서로의 어깨에 짊어진 책임의 무게가 그들의 싸움을 결정할 것이다.
오히려 직접적이어서 메시지의 전달 역시 확실하다. 현대가 배경이었다면 범죄자들이나 아내와 의형제의 몸에 직접 상처를 낼 수 있다. 그만큼의 각오를 보여준다. 장사꾼이 반드시 지켜야 할 것들에 대해서. 하나의 객주를 책임지는 객주인으로써 짊어져야 할 무게에 대해서도. 도끼를 들고 무작정 김학준을 찾아간다. 야만의 시대다. 그것을 이해한다.
http://www.stardail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72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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