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으면 뭐라도 해야 되는 거니까!"
그것은 어쩌면 자기파괴였을 것이다. 모든 것을 부수고 망치고 싶은 자기파괴의 충동이었을 것이다. 지키지 못했다. 존엄이 꺾였다. 양심을 배반하고 신념을 저버렸다. 평생 소중하게 지키고 간직해 온 자신의 전부라 여겼던 것들을 한순간에 모두 잃고 말았다. 그런 자신이 더 이상 살아갈 가치가 있는가. 살아가는 의미가 있는가. 홍인방(전노민 분)이 한순간에 극적으로 바뀌고 만 이유였다. 그럼에도 그는 어떻게든 살아가야 했다.
자신에 대한 실망과 분노는 자신을 그런 지경으로 몰아넣은 시대 그 자체에 대한 원망과 분노로 이어지고 말았다. 이인겸(최종원 분)과 같은 천박하고 탐욕스러운 무리가 권력을 가질 수 있고, 그 권력을 마음껏 휘둘러 자신과 같은 선비들을 농락할 수 있도록 해 준 고려라고 하는 사회와 그 시대에 책임을 묻고자 했었다. 자신에 대한 가장 큰 벌은 지금까지의 자신을 철저히 부정하고 파괴하는 것이었을 터였다. 그토록 혐오하고 경멸하던 그들처럼 되어 있는 자신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 원래 자기는 이것밖에 안되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때로 짜릿한 피학의 쾌감으로 바뀌기도 한다. 중독되고 만다. 습관이 되고 만다.
어차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느것도 해 줄 수 없었다. 현실을 알았다. 꿈을 꾸었었다. 고려를 바꿀 수 있으리라. 고려를 위해 아무거라도 해낼 수 있으리라. 무력감이 원망으로 바뀐다. 고려는 바뀌지 않고 자신만 이렇게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 차라리 탐욕스러운 권문세족들이 백성들이 먹고 살 방도를 걱정한다. 나름의 고려와 고려의 백성들에 대한 애정이었을 것이다. 변질된 애정은 증오보다 더 지독하다. 차라리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면 더 이상 아무것도 할 필요 없이 모든 것을 부숴버리고 말겠다. 타락한 자신과 마찬가지로 더 깊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 망가지는 모습을 보고야 말겠다. 왕조가 바뀌어도 여전히 살아있는 백성의 강인함이 9할의 세금도 견딜 수 있게 할 것이다. 희망이고 절망이며 기대이고 체념이다. 원래 자신들의 것이었기에 분이(신세경 분)는 감영의 곳간을 불태운다.
역설이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새로운 역사에 대한 요구는 커져만 간다. 고려는 끝났다. 고려는 망해야 한다. 고려에는 더 이상 아무런 희망도 기대도 남아 있지 않다. 그나마 마을사람들과 몰래 개간한 황무지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아무리 농사지은 것들을 다 가져가도 거기서 나온 것들로 어떻게 살아는 갈 수 있으리라. 그마저 빼앗겼다. 그것을 희망이라 여겼던 사람들이 처참히 목숨을 잃고 있었다. 처음 관아에 송사를 하려 묻던 분이가 마침내는 스스로 감영의 곳간에 불을 지르고 만다. 터덜거리는 그 걸음이 향하는 곳은 새로운 희망을 건네준 정도전(김명민 분)이 있는 곳이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뜻이, 시대의 의지가, 새로운 역사를 만들려는 정도전에게로 모인다.
백윤이 살해당한 것도 결국 홍인방의 폭주로 인한 나비효과였을 것이다. 이인겸의 눈에 들기 위해 어린 이방지(변요한 분)와 분이가 살던 마을의 땅들을 권문세족들에게 나눠줬던 것이 백성들의 반발을 누르기 위한 사병들의 학살과 약탈로 이어지며 어린 이방지와 분이의 가슴에 깊은 한을 심어주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눈앞에서 일어나는 비극을 무력하게 지켜봐야만 했던 자신에 대한 분노와 자책이 역사를 바꾸고자 하는 직접적인 행동으로 이어진다. 배운 것이 오로지 사람을 죽이는 칼질이기에 어렸을 적 흘려들은 정도전의 계획을 기억하고 직접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며 행동에 나서게 된다. 과연 홍인방이 아니었다면 수줍고 우유부단하던 어린 이방지가 스스로 손에 칼을 쥐고 피를 묻힐 각오를 할 수 있었을까?
그래서 말하는 것이다. 최선은 가장 좋은 것이다. 차선은 가장 나쁜 것이다. 최악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최선은 당연히 잘하는 것일 게다. 부정부패를 뿌리뽑고 부조리와 불합리를 바로잡아 비효율과 낭비를 막는다. 법을 엄격하고 공정하게 적용하여 지배층의 전횡을 막고 백성들의 억울함을 덜어주는 한 편 외부로부터의 위협에도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수단을 갖춘다. 이인임과 길태미(박혁권 분) 같은 무리들을 몰아내고, 권문세족이 함부로 빼앗거나 수조권을 행사하는 땅들을 원래대로 돌려놓는 한 편, 강한 군대를 준비하여 잦은 외침으로부터 나라를 지킨다. 하지만 불가능하다. 이성계도 동북면 함주로 돌아갔고, 사대부들은 뜻만 높았지 현실적인 수단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그저 이대로 더 이상 큰 문제만 일어나지 않게 현상을 유지하는 것이 차선일 것인가. 그보다는 현실의 모순을 극대화함으로써 자각케 하는 것이 내일을 위한 차선일 것인가. 역사에서의 염흥방에 비해 홍인방의 비중이 상당히 크게 그려지는 이유일 것이다. 역사의 계기가 되어준다.
인세의 지옥이었을 것이다. 북쪽에서는 홍건적과 여진족이, 남쪽에서는 왜구가, 더구나 권문세족들은 더 이상 누구의 눈치도 살피지 않고 마음껏 백성을 약탈하여 자신의 욕심을 채운다. 한 해 농사지어 생산한 것의 9할을 세금으로 가져간다. 자칫 반항이라도 했다가는 처참한 살육과 약탈만이 더해질 뿐이다. 더 이상 어떤 기대도 희망도 가질 수 없다. 차라리 왜구가 되어 약탈하는 편에 서고자 하는 고려인들이 적지 않았던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정의도, 인정도, 도덕도 모두 사라져버린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스스로 독해지고 악해져야 한다. 어차피 지배층은 합법적으로 백성들을 약탈할 수 있는 수단이 얼마든지 있다. 굳이 법을 어겨가며 도적이 되어야 했던 많은 이들은 그와는 거리가 먼 경우들이었을 것이다. 이방원(유아인 분)과 무휼(윤균상 분)을 향해 겨눈 고려인 왜구들의 칼은 덧없이 어리석고 불안하기만 하다. 그런 시대에 무엇을 희망으로 여기고 사람들은 살아야 하는가.
무휼의 캐릭터가 흥미롭다. 무술스승이라고 해봐야 말뿐인 사기꾼에 지나지 않는다. 순전히 선천적으로 타고난 재능에 의한 것이었다. 힘이 세고 몸이 빠르다. 눈이 좋으며 판단도 정확하다. 처음으로 목검을 들고 싸운 상대가 자제위에서도 손꼽히는 매화무사 출신이었다. 이방원에 이끌려 고려인 왜구들과 싸울 때도 어리숙하던 모습이 한 순간에 바뀌고 있었다. 맺힌 곳이 없다. 원망이나 한이 없다. 오로지 여자들에 반해 충동적으로 검을 뽑아 그들을 위해 싸운다. 시대의 비극을 칼끝에 드리운 변요한에 비해 그의 칼끝에 지워지게 될 무게는 어떤 것일까. 비로소 스승이 사기꾼인 것을 알게 되었다. 아니 속은 것을 알았다. 답답할 정도로 무거운 가운데 유일하게 가볍다. 무휼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매력이다.
이방원이 이방지에게 이끌리고 그 뒤에 있는 정도전에게 이끌린다. 고려의 역사를 끝내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그들의 계획을 보았다. 까치독사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으러 나선 길에서 분이와 다시 만난다. 처참한 고려의 현실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분이는 정도전을 찾아 자신의 길을 떠난다. 칼은 아직 칼집에 있다. 매력적인 소녀를 보고 반하는 소년의 모습이다. 그래도 사람은 사랑하며 살아간다. 역사를 그러낸다.
http://www.stardail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72459
'드라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사의 신 객주 - 인정마저 넘어서, 리더의 고독과 고뇌 (0) | 2015.10.22 |
---|---|
육룡이 나르샤 - 드라나는 밀본, 함주로 모이다 (0) | 2015.10.21 |
장사의 신 객주 - 칼과 권력, 불의한 시대에 장사꾼으로 사는 방법 (0) | 2015.10.16 |
장사의 신 객주 - 만나고 엇갈리는 인연과 운명, 조소사와 만나다 (0) | 2015.10.15 |
육룡이 나르샤 - 무협의 본질, 칼을 들고 피를 묻히다 (0) | 2015.10.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