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 역사와 상상력, 정도전을 쫓아 함주로 모여든 이들

까칠부 2015. 10. 27. 05:02

아마 이성계가 다시 살아나서 드라마속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면 무척 억울해하지 않았을까. 이인임이 살았을 당시 이성계는 감히 새로운 왕조를 꿈꿀 주제가 아니었다. 아무리 조상이 고려인이었다지만 현실은 대대로 원으로부터 벼슬을 받으며 섬기다가 대세를 쫓아 고려에 귀순해 온 변방의 일개 항장에 지나지 않았다. 고려조정에 연고도 없고, 고려의 군부와도 섞이지 않는 이질적 존재였다.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감히 이인임과 최영이 건재한데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울 결심을 할 수 있었을까.


단지 외지고 척박한 변경에 머물던 군벌로써 본능처럼 중앙정계의 화려함을 동경했을 뿐이었다. 동경하던 중앙정계의 일원이 되어 더 높은 지위와 더 큰 권력을 누리고자 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당시 유력한 권문세족이던 곡산 강씨와 혼인을 맺었던 것이었고, 한때 국정을 쥐고 흔들었던 신돈의 편에 서기도 했었던 것이었다. 최고권력자 이인임과 군권을 틀어쥔 최영 아래에서 전국을 누비며 전공을 쌓는 사이 어느새 그 이름은 고려 전국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이인임이 실각하고 최영마저 정치적인 실책을 범하며 그에게도 기회가 돌아왔던 것이었다. 그리고 하필 그때 이성계의 측근에 있었던 것이 바로 정도전이었다. 과연 정도전이 처음 이성계를 찾아갔을 때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세울 계획을 가졌었는가.


그러나 드라마니까. 픽션이다. 더 재미있게 상상력을 동원해 볼 수 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처음부터 철저히 계획되어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나마 드라마에서는 정작 이성계(천호진 분) 자신에게는 그런 의도나 계획따위 전혀 없었던 것으로 그려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과정을 직접 설계하고 주도하여 완성한 당사자로써 실제 조선건국을 주도했던 혁명가 정도전(김명민 분)을 앞세운다. 고려말 이미 고려라고 하는 구체제의 모순과 한계를 절감한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뜻을 모았고 그 중심에 정도전이 있었다. 역성혁명이라고 하는 반역의 이상을 이루고자 비밀리에 결사를 만들고 은밀히 활동하던 도중 새로운 왕조를 세울 구심점으로써 타락한 고려의 권력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던 동북면의 실력자 이성계를 선택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모든 것은 시작되었다.


하기는 실제 역사에서도 정도전 자신이 그리 말하고 있었을 것이다. 한고조 유방이 장자방을 부려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한고조 유방을 부려 쓴 것이다. 여기서 한고조 유방은 이성계고 당연히 장자방은 정도전 자신일 터였다. 다만 그것이 정도전 자신만의 생각이 아닌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힘없는 모든 이들의 한결같은 바람이었다. 단지 동북면의 군벌 이성계가 개경으로 올라온다는 사실만으로도 많은 사대부가 막연히 기대하게 된다. 기댈 곳 없이 떠돌던 백성들이 아무것도 없이 무작정 이성계가 다스리는 동북면으로 모여든다. 지금 고려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이성계 한 사람 뿐이다. 조직적으로 벌써부터 이성계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를 중심으로 새로운 왕조를 세울 구체적인 계획을 실천해간다.


우연이 아니었다. 어느 한 개인의 의지만은 아니었다. 시대의 요구였다. 모든 이들의 바람이었다. 부정한 시대에 모든 것을 빼앗긴 가난한 농민과 부패한 시절에 양심과 의기마저 꺾이고 만 사대부가 오로지 한가지 희망을 품고 이성계의 주위로 모여든다. 그들이 역사의 주인공이었다. 그들이 역사를 만든 주체였다. 그 중심에 정도전이 있다. 그리고 그 정도전이 선택한 중심에 이성계가 있다. 비로소 그 역사를 위한 개인들의 싸움이 구체화된다. 이방지(변요한 분)도 동북면 함주로 향하고, 무휼(윤균상 분)은 벌써부터 말단 창잡이로 이방원(유아인 분)을 구하는 공까지 세우고 있었다. 아니 같은 시간 개경에서도 정체를 감춘 점장이가 이인겸(최종원 분)에게 동북면의 이성계를 불러들일 것을 예언처럼 전하고 있었다. 적은 명확하다. 고려의 전부. 고려를 지키고자 하는 모두다. 싸움은 시작된다.


그야말로 길잃은 어린아이였을 것이다. 어디로 가야 할 지 막막한데 저기 멀리 사람의 등이 보인다. 그 등만 따라가면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아직 정체도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 대한 이방원의 집착은 차라리 순수한 절박함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번에도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맨다면 결국 자신 역시 홍인방(전노민 분)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고집이다.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손에 피를 묻혔던 그의 의지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래서 그 역시 정도전의 밀지를 받고 함주로 모이고 있었을 것이다. 봄이(신세경 분)만이 아니다. 허강(이지훈 분)만도 아니다. 그렇게 시대는 모두에게 상처를 입히고 깊은 절망의 낙인을 찍는다. 살기 위해 필사적이고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다.


차라리 홍인방이 처음부터 정도전의 지시를 받고 의도적으로 그같은 모습을 보인 것이라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이방지에게 백윤이 죽은 틈을 노려 백윤의 당여를 장악하고 이인겸과 길태미(박혁권 분) 사이에 균열을 일으킨다. 백윤의 당여를 포섭하기 위해 내놓은 9할의 세금이 벌써 두 권력자 이인겸과 최영(전국환 분) 사이에 심각한 충돌을 불러온 뒤였다. 이인겸과 최영의 동맹이 틀어지고, 이인겸의 최근이던 길태미마저 백윤의 당여와 어울리며 멀어진다. 어쩔 수 없이 이인겸으로서는 이미 자신의 실력으로 통제가능한 것이 확인된 이성계를 불러들여 그들을 견제하고 대신케 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나같이 고려를 더욱 막장으로 치닫게 만드는 일들 뿐인데 결과적으로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고 있었다. 반전이 없을 것 같은 것은 하필 예고편을 보았던 탓일 것이다. 역시 흥미롭다. 정도전의 반대편에서 시대를 만드는 것은 다름아닌 홍인방 자신이었을 것이다.


분노를 가슴에 품는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역사에서 실제 이성계가 감히 스스로 왕이 될 야망을 가질 수 없었던 이유와 같다. 이성계 혼자만의 힘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보기에는 이인겸과 최영지 지키는 고려에 남은 힘이 아직 상당하다. 설사 이기더라도 상처만이 남는 불안한 승리가 될 뿐이다. 이길 수 없다면 차라리 지느니만 못하다. 계기가 찾아온다. 이유가 들리고, 구체적인 희망과 계획이 주어진다. 봄이에게 듣는다. 봄이에게 묻는다. 강한 배신감에 분노마저 드러낸다. 분노하면서도 분노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완고함이 수많은 전장을 누빈 노장의 완고한 입매에 묻어난다. 정도전을 만난다. 스스로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개인이 담기에는 너무 거대한 운명이 참혹한 역사의 전장으로 그를 내몰려 한다. 그 순간이다.


하늘아래에서 이인겸과 홍인방, 이성계가 고려의 권력과 미래를 두고 싸운다면 땅 위에서는 지재장사꾼인 화사단과 비국사의 암투가 이어진다. 왕의 지배아래 있는 것이 전하고, 땅위에 자유롭게 거니는 곳이 강호다. 어쩌면 그래서 아직 고려의 왕이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왕의 아래에 있으나 결국 모두가 땅 위에 거닐고 있다. 모든 탐욕과 야심과 좌절과 원망과 분노가 서로 치열하게 엇갈린다. 너무 전형적이라 유치하기도 하지만 원래 장르란 진부할 정도로 반복되는 약속일 것이다. 드라마는 무협드라마다. 확인하며 웃는다. 


http://www.stardail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72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