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어릴 적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라는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사실 그렇게 별다른 느낌 같은 것은 없었다. 일상이었었다.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는 익숙한 현실이었었다. 당장 길거리에 나가면 벌거벗은 채 울부짖으며 매맞는 아이들을 볼 수 있었다. 때로는 손으로, 때로는 몽둥이로, 손에 들 수 있으면 무엇이든 수단이 되고 도구가 되었었다. 아이들은 제제를 닮았었다. 위악적인 허세와 비루한 악의로 고슴도치처럼 자신을 뚤뚤 말아감은.
벌써부터 이성에 눈을 뜨고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이미 술과 담배의 맛을 알았다. 전혀 아무런 죄책감 없이 남의 물건을 훔치고 빼앗았다. 그마저 또래들 사이에 흔한 무용담의 소재로 여겨질 뿐이었다. 누가 어디에서 무엇을 얼마나 훔쳤고, 또 어디에 가면 주인에게 들키지 않고 물건을 훔칠 수 있으며, 자전거와 우유를 더 잘 훔치려면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그렇게 훔친 물건들은 어떻게 돈으로 바꿀 수 있는가. 과연 그 시절 그 아이들을 아무것도 모르는 다른 누군가가 멀리서 본다면 과연 어떤 느낌이었을까?
이번 아이유의 신곡 '제제'와 관련한 논란에서 아이유의 선의를 인정하면서도 결국 아이유의 시도가 실패했음을 단정지어 말하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어쩌면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아이유 자신도 제제가 겪어야 했던 부당하고 일방적인 폭력과 억압을 일상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환경에 있었거나, 아니면 그처럼 잔인하고 야만적인 일들이 일상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을 것이라는 상상 자체를 할 수 없는 혜택받은 환경에서 자라왔거나. 아니 아예 거꾸로 너무 잘알고 이미 익숙하기에 일부러 인정하고 싶지 않아 외면하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제제에게 아이다운 순수함과 잔인함이 공존하는 것은 그를 둘러싼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환경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아직 겨우 5살에 불과했다. 자신의 순수를 지키기에는 너무 작고 너무 어렸다. 굳은살처럼 상처가 생겼다 아문 자리에 단단하게 뭉친 멍울이 자라난다. 단단하고 질긴 껍질이 아직 여리고 약한 자신과 외부를 단절시킨다. 자신의 순수를 외부로부터 분리하여 지키려 한다. 껍질이 자라고 날카로운 가시가 자라며 그리고 어느 순간 순수는 가려진 채 잊혀진다. 그나마 아직 밍기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 제제에게는 아직 순수가 남아있었을 것이다. 너무 일찍 세상을 알았고,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알았다. 하지만 새끼고양이의 공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깨물고 할퀴는 이빨과 발톱마저 그저 귀여운 재롱에 불과하다.
그런 제제의 모순됨이 매력적이라 말한다. 그같은 제제의 이중성이 심지어 섹시하다고까지 이야기한다. 그래서 굳이 스스로 밍기뉴가 되어 제제에게 말을 걸어 보려 한다. 그러나 정작 밍기뉴는 제제에 대해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전혀 아무것도 묵지 않았다. 제제를 보는 밍기뉴의 눈은 있는데, 정작 밍기뉴가 보는 제제는 배제되어 있다. 더 깊이 더 자세히 알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배제된 채 내려진 해석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눈에 보이는 이면의 제제를 무시한 채 보이는 평면만을 확대하여 강조한다. 제제가 지워진다. 대중이 반발하는 이유다. 많은 사람들이 읽고 감동받은 소설이다. 자신이 읽은 사실마저 부정하고 배제하려 한다. 더구나 이미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유명가수다. 아예 이름없는 무명의 3류가수였다면 이런 논란도 없었을 것이다.
대신할 수 있어야 한다. 이미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와 주인공 제제에 대해 대중이 가지는 이미지라는 것이 있다. 아이유가 밍기뉴를 통해 보았던 제제보다 더 깊고 더 자세한 진실들이 이미 대중들 사이에서 이해되고 공유되고 있던 중이었다. 단순히 놀라게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마침내는 납득시켜야 한다. 동의까지는 무리더라도 충분히 그럴 수 있겠구나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만한 가치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미 말했듯 아이유의 제제는 대중이 알고 있는 제제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것이 다가 아니다. 아이유의 제제를 비판하는 대중의 일관된 목소리다. 현상에 머물며 유리벽 앞에 멈춰섰다.
물론 다른 의도가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제제는 제제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의 제제가 아닌, 단지 이름만을 빈 다른 누군가였을 수 있다. 아마 아이유는 알고 있다. 그래서 궁금해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굳이 묻지 않았던 것이다. 더 자세히 알고 더 깊이 이해할 필요 없이 이미 아이유 자신이 대상인 제제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전달되지 않았다. 전혀 아이유 자신을 통해 전해지지 않았었다. 그 부분에 대한 묘사나 설명이 철저히 배제되어 있었다. 제제의 진실 역시 제제의 말과 행동을 통해 이해하는 것이다. 아무 단서없이 이해하는 것은 점쟁이들이나 하는 것이다.
애초부터 작가가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라는 소설을 쓰고자 마음먹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흔히 그것을 주제라 부른다.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이 작가의 작품을 읽고 감동을 느끼는 이유다. 최소한의 각오가 필요했을 것이다. 작가를 넘어서야 한다. 작가의 의도를 대신할 수 있어야 한다. 작가 자신마저 인정할 수밖에 없는 무언가여야 한다.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더 넓게 더 자세히 숨은 것까지 살피고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상당한 수고와 노력이 필요한 과정이다. 상당한 재능과 번득이는 영감이 필요하다. 과연 아이유의 노래가 나오기까지 그만한 충분한 과정들을 거쳤는가. 대중이 판단하기에 부족하다. 대중을 설득할 어떤 타당한 논리와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주장할 뿐이었다. 작가와 작가의 의도가 이미 따로 존재한다.
이런저런 오해들이 불거지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인 것이다.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는 아이유의 해석과는 전혀 다른 소설이다. 주인공 제제 역시 아이유가 이해하는 것과 전혀 다른 캐릭터다. 그러면 아이유의 원래 의도는 무엇인가. 피상적인 단어나 이미지에 집착하는 것도 그만큼 확신할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해하지 못한 채 지나가기에는 아이유라는 이름이 가지는 무게가 이미 우리 사회에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그렇게 해석해서는 안되는 소설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전혀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무엇도 제시하지 못했다. 대중은 학생이 아니다. 아이유가 어떤 해석과 이해를 제시하든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대상이 아니다. 비판도 하고, 반박도 하고, 저항도 한다. 단지 저항이다. 조금 거친 저항.
아이유가 아티스트로서 거듭나기 위해 앞으로도 계속 고민해야 할 부분들일 것이다. 의도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아무리 선한 의도도 대중에게 선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충분한 기술적 고려와 노력이 필요하다. 지금 대중들로부터 비판을 넘어 적의어린 공격까지 받는 것은 바로 그 기술적인 고려와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조금 더 대중에게 다가가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그들이 납득할 수 있는 형태로 전달한다. 시행착오를 거치며 인간은 성장한다. 시련은 인간을 강하게 한다. 무엇보다 더 깊이 인간을 애정하며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제제를 먼저 이해했어야 했다. 아직 과정이다. 아직 어리다. 겨우 한 걸음 뗐다.
그 녀석들을 알고 있다.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사는가까지는 알지 못한다. 매일같이 싸움이었다. 입만 열면 거짓말이었다. 말과 행동은 짐짓 거칠고 사납지만 항상 어딘가에 겁먹고 주눅든 모습들을 보이고 있었다. 누군가 그들에 대해 말한다. 그들에게서 느낀 인상에 대해. 그리고 정의한다. 새삼 떠오르고 만 이유였다.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는 필자에게 감동조차 아니었다. 해석은 자유가 아니다. 인간에게 아픔이 있고 슬픈이 있는 한. 인간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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