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송곳 - 절반의 해피엔딩, 억지로라도 희망으로 끝내고픈 간절함

까칠부 2015. 11. 30. 04:50

역시나 판타지였을 것이다. TV드라마다. 하루의, 혹은 한 주의 고단함을 잊으려 TV앞에 앉은 시청자에게 즐거움과 재미를 선사해야 한다. 꿈이 있어야 한다. 희망이 있어야 한다. 비록 거짓에 불과할지라도 숨어 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내일이면 다시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 지나치게 현실적이어도 이미 지쳐 있는 시청자를 더 우울하게 만들 뿐이다.


하기는 어차피 그럴 수 없으리라는 것을 시청자 대부분이 알고 있을 것이다. 이수인(지현우 분)과 푸르미 노조만 예외였을 뿐 그동안 드라마에서도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암울한 현실을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찢기고 부서진다. 꺾이고 흩어진다. 그나마 남은 사람들도 상처투성이가 되어 그저 버티고 있을 뿐이다. 차라리 노조를 만들고 끝까지 싸우도록 옆에서 도왔던 노동운동가 구고신(안내상 분)을 진심으로 원망하던 노래방 도우미가 더 사실에 가까웠을 것이다. 이수인이 단식을 시작했을 때도 그의 곁에는 이미 더 이상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었다.


위기에 몰리면 어쩔 수 없이 단합하게 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궁지에 몰릴수록 더욱 하나가 되어 함께 문제를 해결하려 할 것이라는 것도 단지 믿고 싶은 신화에 불과하다. 나만이라도 살아야 한다. 모두가 함께 살아야 하겠지만 그 전에 먼저 나부터 살아야 한다. 막다른 궁지에 몰려서 필사의 각오로 역전에 승리하는 경우가 역사상 드문 것도 바로 그래서다. 성이 포위되고 처음에는 지휘관을 중심으로 단결하여 적을 막아내다가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싸움에 사람들은 지치고 스스로 분열하기 시작한다. 배신자가 나온다. 성은 밖에서 뚫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스스로 문을 여는 것이다. 


그래서 아예 처음부터 희망의 싹을 잘라버린다. 아예 다른 생각을 못하도록 다리를 끊고 퇴로까지 막아버린다. 살 수 있는 희망이 없으니 그저 버티는 수밖에 없다. 악으로 버티다 우연이든 어쨌든 상대가 물러난다면 그때야 겨우 살 길이 열릴 것이다. 주소장이 의도한 바일 것이다. 설마 이곳에서의 싸움에 지더라도 도망치지도 못하고 죽어나간 저들의 시신은 다른 곳에서 싸우는 이들에게 동기가 되어 줄 것이다. 입장의 차이인 것이다. 싸움이란 결국 자신의 왕을 지키고 상대의 왕을 잡는 것이라 할 때 과연 무엇이 자신의 왕이고 상대의 왕일 것인가. 주소장은 더 큰 싸움을 그리고 있고 이수인은 단지 자신을 믿고 따라와주는 노조원들만을 지키려 하고 있다. 주소장 역시 구고신과 크게 다르지 않다. 비틀린 현실에 그가 싸우는 모습마저 어딘가 잔뜩 비틀리고 일그러져 있다.


그렇게라도 해야 한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싸움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동안 숱하게 보아 왔을 것이다. 스스로 분열하여 안에서부터 무너져내리는 나약한 군상들을. 노동자를 믿지 않는다. 정작 노조에 가입하여 노조와 행동을 함께하려는 노조원들을 전혀 믿지 않는다. 믿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이상 뿐.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당위 뿐이다. 주소장 역시 지치고 마모되어 있다. 그리고 거의 그의 말대로 되고 있었다. 그야말로 천행으로 프랑스에서 마침 인사담당자가 한국을 찾지 않았다면 그나마의 성과라도 이수인은 거둘 수 있었을까? 노조원들은 거의 다시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갔고, 서로 의지하던 동료인 지부장 주강민(현우 분)도 회사를 그만두고 처음 계획했던 대로 황준철과 청과상을 시작하고 있었다. 드라마였다. 실제 이야기의 모델이 된 카르푸사태에서도 해결되기까지 거의 몇 년의 시간이 필요했었다.


악이 아니다.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저 서로 목적과 방법이 달랐을 뿐이다. 이수인이 끝내 구고신을 등지게 된 이유도 그것이었다. 이수인에게 이것은 첫싸움이지만 저들에게 이것은 그동안의 수많은 싸움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앞으로 치르게 될 더 많은 싸움들 가운데 단지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관성이 이제 막 시작되려는 이수인의 싸움과 부딪힌다. 마침내 이수인은 모두를 선동하여 푸르미 노조의 위원장과 주소장을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단식을 하면서 환상처럼 아내와 행복하던 평화롭던 어느날의 자신을 본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지 모르는 먼 어느날의 모습이었다. 그게 전쟁인 것이다. 피투성이가 되어 더러운 진흙탕을 구르면서 삶을 위해 승리를 위해 발버둥친다.


거의 마지막 수단이다. 자신의 목숨마저 내걸고 단식에 들어가는 것은. 그나마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언론이라도 보도하지 않으면 철저히 잊혀지고 말 뿐이다. 그러다가 지치겠지. 그러다가 알아서 목숨이 위험하면 그만두겠지. 그래도 다른 모든 수단이 통하지 않으면 목숨이라도 거는 수밖에 없다. 문소진(김가은 분)이 단식을 시작하고 얼마 안있어 이수인도 마지막 수단으로 단식을 선택한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가.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그럼에도 구고신 역시 문소진을 살리려 함께 단식에 들어간다. 가련한 것이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임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버텨야 한다는 것은.


그래도 사람이 남았다. 좌천되어 내려온 교육원에서 자신을 영웅처럼 여기며 의지하려는 유일한 노조원을 만났다. 아내가 보낸 메일을 확인하다가 놓아두고 온 일동점 사람들이 보낸 메일을 받았다. 다시 용기를 얻는다. 다시 힘을 얻는다.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불행해질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래도 쓰러져 병원에 실려간 구고신의 주위에는 그의 도움을 받은 많은 노동자들이 있었다. 그것이 연대다. 사람이 남는다. 내가 그를 위하고 그가 나를 기억한다. 우리가 된다. 자신은 틀리지 않았다. 자신은 옳은 일을 한 것이다.


정민철(김희원 분) 부장의 마지막과 비교되고 있었을 것이다. 같이 일동점에서 밀려났다. 한 사람은 좌천되었고 한 사람은 구속되었다. 그러나 돌아올 수 없는 한 사람에게는 일동점 직원들이 마음이 달려갔다. 돌아올 수 있었던 한 사람에게는 바로 앞에서도 누구 한 사람 아는 체 하는 이가 없다. 바닥에 달라붙은 라벨지를 떼어 쥐고 돌아가는 모습에서 마트에 대한 정민철의 진심을 엿볼 수 있다. 나름대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러나 무엇이 남았는가. 단, 정민철이 조금만 영리했다면 그는 더 위에서 전혀 다른 풍경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어차피 모두는 회사로부터 고용되어 일해주고 월급받는 같은 처지의 노동자에 불과하다. 나만은 다르다. 나만을 다를 것이다. 고민이 많던 순간 걸려온 형과 형수의 전화가 차라리 원망스럽다. 현실에 떠밀린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의 압력에 선택을 강요받는다. 가련한 이 사회의 군상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자신은 물론 어느 누구도 그는 지키지 못했다. 누구보다 간절히 지키고자 했지만 정작 그는 어느것도 지키지 못한 채 끝내 혼자가 되고 말았다.


이길 수 없다. 이기려 해서는 안된다. 차라리 드라마가 주는 교훈이었을 것이다. 이수인이었기에 가능했다. 푸르미였기에 가능했다. 프랑스의 자본이 세운 외국계 기업이다. 그런데도 고작 그런 정도도 감당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도대체 얼마나 자신은 버티고 견딜 수 있을까. 그렇게라도 억지로 희망으로 끝내고픈 마음을 이해한다. 공허가 지나간다. 현실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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