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회

기술발전과 노동시간의 상관관계...

까칠부 2015. 12. 15. 07:07

간단히 아주 오래전 아직 채집과 수렵으로 살아가던 시대에 누군가 하루종일 돌아다녀 얻을 먹을 것을 한 시간만에 확보하게 되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과연 그 다음 어떻게 했을까? 


농업혁명은 인간을 노동에 종속시켰다. 하루종일 일하고 다음날도 똑같이 밭에 나가 일해야 한다. 그러고서야 겨우 한 해 먹을 것을 못미치게 거둬들일 수 있었다. 더 많은 시간 동안 더 많은 일을 하는 것은 생존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미덕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보다 더 적은 노력으로도 더 많은 작물을 수확하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어느 정도 아직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는 동안에는 생산의 증가가 곧 소득의 증가로 이어진다. 그러나 일정 수준에 이르러 더 이상 시장에 필요로 하는 사람이 거의 없게 되면 결국 늘어난 생산은 부담으로 남게 된다. 차라리 농작물은 갈아엎어 거름으로라도 쓸 수 있다. 그런데 자동차라든가, 운동화라든가, 컴퓨터라든가, 그래서 남아도는 것들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바로 현재 세계경제를 뒤덮고 있는 암운의 정체일 것이다. 생산기술은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전에 비해 몇 배, 아니 몇 십, 몇 백 배의 제품을 더 짧은 시간 안에 더 적은 노동으로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필요한 노동자의 수는 적어지고, 그에 따라 노동자의 임금소득도 줄어든다. 결과는 노동자가 직접 소비자로서 자신이 생산한 제품을 더 이상 소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어느 사회든 마찬가지다. 생산의 증가를 소비의 증가가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재고는 쌓여만 가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기업과 소비자에 돌아간다.


아마 그래서 스웨덴에서는 최근 하루 6시간 노동이라는 새로운 실험을 시작하고 있는 것일 게다. 하기는 원래 하루 8시간 노동도 그 전까지 하루종일 공장이 돌아가는 동안 쉬지 않고 일을 시키던 - 어디서 많이 본 풍경이다 - 것에서 조금이라도 노동시간을 줄이고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나온 아이디어였을 것이다. 최초의 주창자가 아마 로버트 오웬이었던가? 그리고 핸리 포드에 의해 노동시간은 물론 임금까지 2배로 올리면서 생산성과 구매력의 확대에 크게 성공하고 있었다. 노동자의 주머니에 여유가 생기면 그 여유는 바로 소비로 이어진다. 포드가 생산한 자동차를 포드의 노동자들이 구입한다.


어차피 지금 이대로는 갈수록 생산현장에서 노동자의 수요는 갈수록 줄어만 가게 될 것이다. 노동자의 수요가 줄면 노동자의 소득도 줄고 이는 곧 기업과 사회 모두에 부담으로 작용한다. 노동시간을 줄이는 대신 고용을 늘리고, 남는 시간을 자기를 위해 투자하도록 함으로써 소비를 유도한다. 기업과 정부의 협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기업이 무한정 노동자의 임금을 올려줄 수 없다면 나머지는 정부의 지출로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최소한의 기본생활을 보장함으로써 임금에 대한 의존도를 낮춘다. 고용이 늘고 여가와 소비가 늘어가면 당연히 서비스업에서도 시장은 활성화된다.


우리나라와는 아마 거꾸로 가고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내수란 버린 시장이다. 오로지 수출만이 살 길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수출만이 살 길이라면서 정작 국제시장에서 경쟁하기 위한 투자에는 인색하다는 점일 것이다. 투자는 않고 오로지 노동자의 임금만 줄여 차익을 실현하려 한다. 그런데 앞서의 오류가 반복된다. 생산성의 향상으로 노동자의 임금이 생산에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었는데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노동자의 임금을 통해 이윤율을 향상할까? 


그래서 정부가 앞장서서 국민들더러 빚을 지라 독려하는 것이다. 이미 한국국민의 임금소득은 한게에 이르렀다. 더이상 줄일 것이라고는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지 오래였다. 하지만 소비르 해야 한다. 그래야 내수가 유지된다. 빚을 지라. 특히 건설회사들을 위해 빚을 내서 아파트를 사도록 유도한다. 더 적은 임금으로 더 많은 일을 하며 그러나 부족한 소득은 빚으로 대체하라. 그 끝은... 하지만 그런 걸 지지하는 자영업자들이 더 많다는 것이 대한민국 수준이다. 어째서 자영업이 그리 어렵고 위태로운 것인가.


손학규가 주장한 '저녁이 있는 삶'이란 구호에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이 이끌리는 이유인 것이다. 문재인의 '소득주도성장론' 역시 설득력을 갖는다. 이 두 가지를 더해야 한다. 안철수의 '공정성장론'까지 더한다면 이보다 완벽할 수 없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당을 위한 정책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정책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가능하다면 모두 더해서 하나로 만드는 것이 옳다.


더 많은 여유와 더 충분한 수입과 그리고 공정하고 안정적인 삶. 너무나 당연한 것일 텐데도. 국가를 위해. 나라경제를 위해. 대기업이 살아야 하므로. 비정규직을 위해 비정규직을 더 늘린다.


한 달 수입의 3분의 1을 써보기도 전에 내일을 위해 저축한다. 나머지 가운데 3분의 2가 고정비용으로 들어간다. 소비의 여력이 없어 아끼고 또 아끼며 살아간다. 아마 그나마 내가 사정이 좀 더 나은 축에 들 것이다. 최소한 내게는 부양해야 할 가족은 없으니까. 고양이 세 마리가 전부다. 과연 이같은 현실이 옳은가.


잘살기 위해 일을 한다. 최소한 걱정없이 살기 위해 직업을 구하고 열심히 일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보장되는 것이 없다. 노동생산성의 문제를 말한다. 답은 멀리 있지 않다. 현실은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