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더불어민주당(일일이 당명을 바꾸어 말하기 귀찮으므로 이후 제 1야당으로 통일)이라면 대한민국 정치지분의 절반을 차지하는 단 둘 뿐인 거대정당 가운데 하나인데 어째서 지금 이처럼 처참할 정도로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인가. 소속정치인들은 떠나고, 정작 표를 주어야 할 유권자들은 신뢰를 보내지 않는다. 가장 자신들을 두려워하고 경계해야 할 또다른 거대정당 여당조차 오히려 우습게 여긴다.
하기는 어쩔 수 없다. 굳이 더 멀리 갈 것도 없다. 1996년 정계복귀를 선언한 김대중이 3당합당에 반대한 통일민주당의 잔류파와 자신이 만든 평화민주당을 통합하여 야당의 전통을 복원한 당시의 제 1야당 민주당을 깨뜨리고 새정치국민회의를 만든 것부터가 모든 문제의 시작이었으니까. 그나마 당시까지 민주당은 단일한 정체성으로 뭉쳐 있었다. 어찌되었거나 군사독재정권과 맞서싸우며 이땅의 민주화를 이루어낸 동지들이었고, 3당합당이라는 군사독재의 후신들과의 야합에 반대하는 같은 목적과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새정치국민회의는 아니었다. 그것은 철저히 김대중 자신만을 위한, 자신의 대권을 위한 제한적 목적을 가지는 그저 김대중 개인의 사당에 지나지 않았다.
다시 말해 민주당이 분열하여 새정치국민회의가 창당된 순간 군사독재정권과 맞서싸웠던 제 1야당의 정체성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단지 김대중이라고 하는 늙은 정치인 개인의 권력욕을 위한 한시적 목적의 정당만이 남게 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통합민주당도 결국 신한국당과 통합하여 한나라당을 만들며 흡수된으로써 독재정권과 맞서 싸우고, 3당합당이라는 야합에 반대하던 제 1야당의 정체성은 어디에도 깃들지 못한 채 허공을 떠도는 유령과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만일 김대중이 대권도전에 성공하여 더이상 대권을 목표로 할 필요가 없어진다면 남은 새정치국민회의는 이제부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었을까? 바로 그것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었다.
과연 새정치국민회의, 아니 새천년민주당은 이제부터 무엇을 목표로 무엇을 추구하며 정치를 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주지 못한 채 김대중은 대통령이 되었고 임기말에 이르러 모든 동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새천년민주당이 다시 찢어져 열린우리당이 만들어지는 이유였다. 더이상 새천년민주당으로는 자신들이 꿈꾸는 내일을 담보할 수 없다. 새로운 그릇에 새로운 내용물을 담아 새로운 내일을 여는 도구로 쓸 것이다. 하지만 역시 이 경우도 정작 그 동기와 동력이 되어주었던 노무현 자신이 당청분리라는 원칙 아래 열린우리당과 거리를 두면서 누구 하나 확실한 구심점 없이 명확한 정체성과 지햐을 찾아내는데 실패하고 만다. 탄핵에 대한 역풍으로 얻어진 소중한 기회를 단지 자신의 세력을 불리고 당권을 장악하여 마음대로 하고자 하는 욕망을 충족시키는데 허비하고 만다. 노무현 당선 직후 새천년민주당이 깨지고 열린우리당이 창당되었듯 동력을 상실한 열린우리당은 통합민주당으로 크게 몇 걸음을 물러서고 만다.
과연 더불어민주당은 무엇을 하는 정당인가? 무엇을 목표로 무엇을 하고자 하는 정당인가? 원래 정당이란 그같은 단일한 목표와 지향, 정체서을 공유하는 이들의 정치적 결사체였을 것이다. 같은 신념과 이상과 목적을 공유하는 이들이 모여 그를 실현하기 위한 힘을 모은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런 것 없이 시작했고, 그런 것 따위 무시하며 발전해 왔다. 신념도, 이상도, 지향도, 목적도 모두 사라져버린 정당에 남은 것이란 단지 권력을 향한 추악한 욕망 뿐이다. 지금의 더불어민주당이 그렇다.
그렇다면 문재인은 다른가? 다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크게 다른 것은 없다. 문재인 자신도 과거 민주화운동을 하던 시절의 선과 악의 이분법을 여전히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악이 아니니 선이다. 선이 아니니 악이다. 그렇다면 그 선은 무엇을 추구하며 어떤 정체성을 가지는 선인가. 과연 민주당이 더불어민주당은 이런 정당이 되어야 한다 명시적으로 선언한 적이 있었는가. 그것을 지키고 따르는 이들은 있기나 한 것인가? 다만 그럼에도 한 가지 문재인이 지금 하고자 하는 정당의 혁신이란 그를 위한 가능성을 열어두려는 과정인 것이다. 유권자의 의지가 직접 정당에 전달된다면 유권자의 요구가 곧 정당의 정체성이 될 것이다. 한참의 혼란이 뒤따르겠지만 결국 그를 통해 유권자와 정치인들 자신에 의해 더불어민주당의 정체성도 정해진다.
그동안 안철수의 신당이 유권자들에 보여주고 주장해 온 자신들의 정체성이란 단 하나였다. 안철수. 안철수의 새정치. 새정치란 아직 실체가 없으니 그 또한 안철수라는 이름에 귀속된다. 안철수를 대선후보로 만들기 위한 정당이다.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여 대권을 노리기 위해 만들어진 정당이다. 그런데 안철수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되었다. 혹은 끝내 좌절되어 더이상 대통령선거로 나갈 통로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고 나면 안철수의 신당에는 무엇이 남게 되겠는가. 단일한 정체성도 지향도 없이 모인 저 복잡한 군상들을 어떻게 하나로 유지해 나갈 것인가.
2012년 대선 당시부터 안철수를 불편하게 여겨온 이유인 것이다. 그래서 안철수의 임기가 끝나고 나면 그 뒤에는 무엇이 그를 대신하게 될 것인가. 그나마 김대중의 뒤에는 노무현이 있었다. 그 노무현이 김대중이 만든 새천년민주당을 부정하고 있었다. 노무현은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남긴 유산들이 김대중의 유산과 얽히며 지금의 혼란스런 야당을 만들고 말았다. 그나마 안철수에게는 소속정당도 세력도 없었다.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국회의원 한 번 해 보지 못한 사람더러 대통령하라고 지지율도 높다.
과연 박근혜가 사라져도 새누리당은 남는다. 당명은 바뀔지라도 이명박이 물러나고 그와 적대하던 친박이 당권을 잡았지만 여전히 새누리당은 새누리당이었다. 그것이 정당이다. 중간에 김영삼이 있어도, 이회창이 있어도, 그럼에도 한결같은 새누리당이라는 정체성. 야당에 그런 것이 있는가. 야당이 여당에 비해 전혀 신뢰받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고 일어나면 인물도 당이름까지 모두 바뀌고 만다.
시대가 퇴행하려 하고 있다. 정부와 여당만이 아니다. 야당도 마찬가지다. 20세기에 이미 모두 끝난 것이라 생각했다. 열린우리당의 실패 이후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 여겨왔었다. 현실은 항상 가정보다 가혹하다. 문재인의 혁신에 기대는 이유다. 인물이 아니다. 시스템이다. 정치인 개인의 역량이 아닌 유권자 자신의 참여다. 그래야 할 테지만. 당장의 현실의 안타깝다. 우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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