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는 중도라 여긴다. 좌도 우도 아니다. 진보도 보수도 아니다. 여도 야도 아니다. 그러니 중도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중도를 두고 달리 정치냉소층이라 부른다. 왜? 그러면 좌도 우도 아니고, 진보도 보수도 아니며, 여도 야도 아닌 자신들을 스스로 무어라 정의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지금 안철수와 국민의당이 겪고 있는 혼란과 모순의 근본적 원인일 것이다. 그저 좌도 우도 아니면 된다. 진보도 보수도 아닌 가운데서 양쪽을 모두 아우르면 그것이 중도다. 여와 야를 함께 비판하고 좋은 것이 있으면 여든 야든 가리지 않고 모두 자기 것으로 한다. 하지만 결국 그래봐야 가운데서 조금만 좌우로 비켜나도 반대편에 있는 안철수와 국민의당의 모습만 확인하게 될 뿐이다.
조금만 오른쪽에 있어도 안철수는 우가 아니며, 보수도 아니고, 여도 아니다. 조금만 왼쪽에 있어도 국민의당은 좌가 아니고, 진보도 아니고, 야도 아니다. 그런 안철수가 오히려 우를, 보수를, 여를 비판하는 모습마저 보인다. 자신의 반대편에 있는 좌를, 보수를, 여를 편드는 모습도 보이게 된다. 그래서 안철수와 국민의당의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 답을 다시 양쪽 모두를 비판하며 모두를 가지려는 이중적인 모습을 통해 들려주려 한다. 그러니 중도다. 반복이다.
중도를 하나의 성향이자 노선으로 인정하기 어려운 이유인 것이다. 양쪽 모두를 싫어하거나 아니면 양쪽 모두를 긍정하려 하지만, 그러나 정작 자기만의 주장이나, 논리, 대안은 가지고 있지 못하다. 무엇을 하겠다. 어떻게 하겠다. 그를 위해 어떤 수단과 방법들을 동원하겠다. 어떤 과정들을 거치겠다. 그것이 이념이다. 그것이 성향이다. 그래서 좌든 우든, 진보든 보수든, 여든 야든 서로 나뉘고 갈리는 것이다. 그런데 중도에게는 무엇이 있는가. 양쪽 모두를 비판하고 모두를 수용하며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중간에 있다 스스로 자위하는 것 말고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그래서 중도가 쉽게 언론과 여론의 먹이감이 되고 마는 것이다. 자기만의 명확한 기준과 방향이 없으니 주위에서 하는 말에 너무나 쉽게 휩쓸리고 만다. 언론의 선동이 가장 잘 먹히면서, 여론의 흐름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바로 이들 중도인 것이다. 중도의 지지를 등에 업고 등장한 정치인이나 정당 가운데 실제 성공적으로 현실정치에 안착한 경우가 드문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바로 어제까지 지지를 보내던 사람들이 사소한 이유를 앞세워 오히려 반대편에서 비판하는 입장에 선다. 중도이기에 때로 좌가 되고, 때로 우가 되며, 때로 진보와 보수를 오가면서, 그러나 당장 자신의 눈에 보이는 어느쪽이든 마음에 안드는 부분들을 굳이 참아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중도로부터도 버림받는다.
결국 양쪽 모두를 비판하는 동안 양쪽 모두에게 비토의 대상이 되고 만다. 양쪽 모두를 선택하는 순간에도 양쪽 모두는 다시 반대의 이유로 그를 비토하게 된다. 중도 역시 중도이기에 더 자주 양쪽을 오가며 더 엄격하게 자신을 판단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중도정당과 정치인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중도란 양쪽 끝의 가운데가 아닌 또 하나의 극단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1차원의 선이 아닌 2차원의 면이고 3차원의 입체다. 양쪽 모두에게, 그리고 중도에게도 보기에 한결같은 자신의 노선과 정체성을 분명히 한다. 나는 둘 모두 다르게 이런 자신만의 정치를 펼쳐보이겠다.
안철수와 국민의당의 지지율이 답보를 넘어 아예 급락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이유인 것이다. 명백한 노선과 비전이 없다. 정체성을 보이지 못한다. 우는 좌를 의심하고, 좌는 우를 의심한다. 해명하려 할 수록 더욱 깊은 늪으로 빠져들어간다. 비판을 해명하려면 긍정해야 하고, 긍정을 해명하려면 비판해야 한다. 모두가 판단에 영향을 준다. 그리고 나면 남은 것이 없다. 안철수가 탈당의 명분으로 삼았던 새정치조차 이제는 그 흔적마저 찾아보기 힘들다. 무엇을 하던 이제 남은 것은 비판받는 것 뿐이다.
더 명확히 해야 한다. 여당도 야당도 하지 않는 것을 과감하게 시도해야 한다. 진보도 보수도 감히 생각지 못한 것을 먼저 행동에 옮길 수 있어야 한다. 좌도 우도 아니지만 자신들이 옳다 믿는 또다른 노선과 정체성이 있다. 설득한다. 남득시킨다. 동의를 얻어낸다. 지지를 받는다. 그것이 정당정치다. 정당정치는 철저히 이념에 기반한다. 유권자와 정치인 사이의 이해와 입장이 일치하는 공유점이다.
네거티브로는 그저 두 정당이 싫다는 사람들에게 일시적인 카타르시스를 줄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은 불가능하다. 양시양비론으로는 두 정당의 지지자들과 적대하지 않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선택 또한 받지 못한다. 중도에게 중도라고 하는 정체성을 부여한다. 중도인 자신들을 지지해야 하는 당위다. 아니라면 그등은 또다시 정치를 냉소하며 변덕스런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뿐이다.
더민주와 국민의당의 차이다. 국민의당을 제외한 다른 기성정당들과 그들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기존의 정당을 욕하는 것은 그동안 보아온 그들의 정체에 대한 판단이 이미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지지하는 사람도 그런 것까지 모두 감안하고 지지한다. 선거때가 되면 중도 역시 그를 전제로 자신만의 선택을 하게 된다. 이들 중 누구인가. 이들 가운데 어느쪽인가. 그것이 없다. 치명적인 한계다.
쓸데없는 이념논쟁보다 가장 우선해야 할 부분이다. 기계적인 양시양비론이나 이벤트보다 더 중요하게 우선해서 해결해야 할 부분이다. 못하면 뒤란 없다. 만일 진정 제 1야당이 되고 대선후보가 되려 한다면. 그동안 자신을 비토하던 유권자들에게도 투표할 이유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반드시 자신에게 투표해야만 한다. 아직까지 없다. 시간이 없다.
사실 중도라고 해도 모두가 그냥 양쪽 모두를 비판하고 긍정하며 어느쪽도 아닌 자신에 만족하며 있는 것은 아니다. 둘 어느쪽도 아닌 자기만의 명확한 기준과 지향, 노선이 있다. 대안과 주장이 있다. 노려야 할 것이다. 다만 그동안 근사치만을 찾아 자신을 희생하고 있었다. 안타까운 것이다.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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