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王子)와 왕자(王者)가 다른 이유다. 존엄이란 홀로 이루는 것이다. 스스로 존귀하기에 존엄하다 하는 것이다. 역사상 위대한 영웅들에 의해 시작되었던 수많은 왕조들이 그 자식, 혹은 그 자식들에 의해 빠르게 몰락하고 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의 나라인가, 아니면 단지 물려받았을 뿐인 아버지의 나라인가. 왕이란 자신에게 무슨 의미인가.
"전 말입니다... 제 방식으로 세력을 만들어내고 말 겁니다. 전 죽었다 깨어나도 제가 맞는 것 같거든요. 전 아마 이런 식으로 제 자리를 찾게 되겠지요."
전작 '뿌리깊은 나무'에서도 이와 비슷한 장면이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인 자신을 거스르려는 임금 세종에게 태종은 빈 찬합을 보낸 바 있었다. 마치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후한의 마지막 충신 순욱이 조조로부터 빈 찬합을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을 연상케 하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정작 세종은 빈 찬합을 받고서 오히려 그 안을 태종이 사라진 이후 자신이 만들 새로운 나라에 대한 구상으로 채워 다시 되돌려주고 있었다.
바로 왕이 된 자와 신하가 된 이의 차이다. 왕이란 주인이다. 신하란 왕을 따르는 존재다. 왕이란 주인으로서 오롯이 판단하고, 신하는 오로지 도구로써 그 의지를 쫓아 실천한다. 아무리 신하가 박식하고 현명하여 바르게 조언하더라도 그를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왕 자신의 몫인 것이다. 누구에게도 미루거나 맡길 수 없는 왕 자신의 책임이고 권리다. 그것을 포기하는 순간 왕은 왕이 아니게 된다. 그것을 욕심내는 순간 신하도 신하가 아니게 된다. 왕은 자신의 앞에 놓인 빈 찬합을 자신의 의지로써 채워넣어야 하지만, 신하는 빈 찬합을 빈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왕자(王子)와 왕자(王者)가 다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단지 길이 있기에 그 길을 따라 걸어간다. 자신이 가려 해서가 아니다. 자신이 가고자 해서가 아니다. 자신이 길을 걷는 것이 아니다. 길이 자신을 태우는 것이다. 물론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 자체를 자신의 의지로 삼으려는 경우도 있다. 더 정확히 어긋나지 않게 자신의 앞에 놓인 길을 충실히 따라 걷는 것만을 자신의 목적으로 의도로 삼는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이미 먼저 그 길을 닦은 누군가의 의지를 따르는 것이다. 판단의 기준은 바로 앞서 길을 닦은 바로 그 누군가인 것이다.
반만 왕자(王者)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스스로 판단하여 결정한다. 길이 없으면 아예 자신이 새로 만든다. 이미 기존의 길이 있다면 자신의 의지로써 그 길을 선택하여 걸어간다. 그 과정에서 어디를 어떻게 거쳐서 갈 것인가도 모두 자신이 결정한다. 때로 전혀 엉뚱한 길로 빠지고, 때로 길을 잃고 한참을 돌아가고, 때로 막다른 곳에서 위험을 만나더라도, 그마저도 모두 자신의 선택이며 자신의 책임으로 여긴다. 오롯이 이 길의 주인은 자신이다. 그래서 그는 왕자(王者)다. 자신의 길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이미 말했다. 왕이란 스스로 주인된 자라고. 스스로 존엄한 존귀한 존재라고.
이미 이성계(천호진 분)에게는 이성계만의 길이 있다. 정도전(김명민 분)에게도 정도전만의 길이 있다. 한때 아버지의 길이 자신의 길이라 여겼던 적이 있었다. 정도전의 길을 자신의 길이라 여기며 무작정 따르고자 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 두 개의 길이 만나 마침내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웠을 때 정작 그곳에 자신의 길은 없었다. 아버지로부터도 부정당하고 스승인 정도전으로부터도 버림받았다. 두 사람의 뜻을 어기고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갔다는 이유만으로 모두로부터 외면당한 채 외딴 곳에 남겨졌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대로 아버지와 정도전의 뜻을 쫓아 그들이 바라는대로 얌전히 지금의 자리만을 지키고 있을까?
결정은 이미 오래전에 했다. 무명과 손을 잡은 순간 그의 길은 무명과 가까운 어떤 곳에 있었다. 언젠가 그들과도 멀어지는 순간이 온다. 자신이 그들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을 따르는 것이다. 두문동의 선비들도 자신이 그들을 설득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을 설득해야 하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이 자신에게 매달리며 사정해야만 한다. 왕의 길이었다.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으며 무엇으로부터도 구속되지 않는다. 아버지 이성계와도 스승 정도전과도 다르다. 그들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혀 다른 왕이, 전혀 다른 새로운 나라를 만들겠다. 자신이 옳다. 자신은 틀리지 않았다. 그들이 틀렸다. 그 순간 이미 새로운 나라 조선 안에 이방원(유아인 분) 자신만의 새로운 나라가 생겨난다. 반역이 아니다. 전쟁이다. 그 선포다.
조금은 뜬금없었다. 느닷없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논쟁이 이어진다. 무명이 정도전이 추진하던 토지개혁에 반대한 이유가 설명되고 있었다. 무명은 욕망을 긍정한다. 인간의 욕망이야 말로 인간을 향상시키고 발전시키는 동기이고 동력이다. 사전이 있어야 더 많은 사전을 가지기 위해 인간은 노력하고 경쟁한다. 더 많은 사전을 가지기 위해 황무지를 개간하고, 갯벌을 간척하여 새로운 농지를 만든다. 그러나 그렇게 늘어난 토지들이 지금 누구의 소유로 누구를 위해 쓰이고 있는가. 욕망하는 자가 있기에 인간은 발전하고, 그러나 욕망하는 자가 있기에 대부분의 인간의 삶은 피폐하다. 무엇을 우선해야 하는가. 물론 결론은 내려져 있다. 어떤 경우에도 결코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농민에게 땅을 골고루 나누어주려던 모든 시도들도 그래서 역사에서 대부분 실패하고 말았었다.
아무튼 시대에도 맞지 않는 논쟁이 드라마와 겉돌고 있었다. 당시의 시대와 현실을, 그리고 자신들이 지나온 역사를 전혀 자신들의 논리 안에 담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더 치밀하게 준비했어야 했었다. 정도전이 추구하는 성리학의 이상과 신라와 고려의 역사를 보다 깊이 있게 방대하게 조사하여 이해하고 그것을 대사로써 녹여낼 수 있었어야 했다. 고려말을 살아가는 이들의 논쟁이 아니었다. 차라리 그 시대에 어울리게 오로지 권력을 향한 욕망만으로 단순하게 풀어내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설득력있었을지 모른다. 의도가 넘쳤다. 욕심이 지나쳤다.
마침내 정도전이 의도한대로 공양왕(이도엽 분)이 스스로 양위하며 이성계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정몽주가 가지고 있던 명분은 정도전의 예상대로 대부분의 백성과 사대부들을 새로운 왕조로부터 등돌리도록 만든다. 순리가 무너진 다음에는 역리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역이란 폭력이다. 힘으로 사실을 만든다. 힘으로 진실로 만든다. 힘으로 명분까지 만들려 한다. 새로운 왕조를 기정사실로 만들고 자신이 구상한 정책들을 밀어붙여 그 결과를 보여준다면 백성도 사대부도 다시 마음을 돌리게 될 것이다. 이방원이 처음부터 주장하던 것이었다. 정도전도 어쩔 수 없이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그를 지탱하는 것은 자신이 만들려는 새로운 나라에 대한 확신과 자신이다.
새로운 왕조를 위해 모두가 바쁘게 움직인다. 연희(정유미 분)와 분이(신세경 분) 또한 자신의 조직을 이용해 정도전이 의도한 바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정도전이 의도한 소문을 퍼뜨리고 필요로 하는 정보들을 모은다. 정도전과 거리를 둔 이방원은 버려진 만큼이나 더욱 독자적으로 자신의 세력을 갖춰간다. 하륜(조희봉 분)마저 대부분의 사대부가 떠나며 텅 비어버린 조정으로 들어와 이방원 앞에 나타난다. 척사광(한예리 분)과의 대결을 통해 이방지(변요한 분)와 무휼(윤균상 분)도 인간으로서나 검술로서나 한 단계 성장한다. 왕조야 바뀌든 말든 인간의 일상이란 이처럼 여전히 분주하기만 하다.
죽이기 위한 칼이 아니다. 지키기 위한 칼이다. 복수보다도 소중한 사람과의 평온한 시간이 더 절실하다. 공양왕과 떠나는 척사광의 뒷모습을 무휼은 말없이 지켜본다. 장차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게 될 이방원의 형 이방간(강신효 분) 역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조영규(민성욱 분)에게 정몽주를 살해한 손맛을 묻는 모습이 범상치 않다. 상당히 개성적이고 파격적인 캐릭터일 것을 기대하게 한다. 하나의 적이 사라지고 새로운 적이 나타난다. 연향도 결심을 굳힌다. 정도전과는 이제 전쟁 뿐이다.
왕이 되었다. 비로소 이방원은 자신의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두문동에서 오로지 자신만의 길을 가고자 하는 패왕의 첫걸음을 거침없이 내딛으려 한다. 연향과 정도전의 대화는 단지 무명과 정도전 사이에 피할 수 없는 충돌만을 예고할 뿐이었다. 잔혹한 권력의 역사가 소용돌이친다. 아직 누구도 선택할 수 없는 평범한 인정들이 애처롭다.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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