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회

이성과 감정 - 지향과 사실...

까칠부 2016. 3. 7. 03:25

그냥 간단히 사람이 정의를 추구하는 것은 세상이 정의롭기 때문인가 정의로워야 한다고 믿기 때문인가. 하기는 세상이 정의롭다면 그렇게 모든 사람이 정의를 이야기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도덕적이지 못하기에 도덕을 말하고, 윤리적이지 못하기에 윤리를 말하고, 법을 지키지 않기에 준법을 말한다. 마찬가지다. 이성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은 이성을 이야기한다.


인간이란 고도의 오류가 집적된 컴퓨터와도 같다. 인간의-아니 생명의 진화 자체가 결국 누적된 오류의 산물이다. 유전정보의 복제가 완전하지 않기에 오류들이 쌓여 단세포생명이 다세포생명이 되고, 그 가운데 척추동물이 나오고, 포유류가 나오고, 마침내 인간까지 태어나게 된다. 처음 어느 영장류에게서 인류의 조상이 태어났을 때 부모는 얼마나 놀랐을까? 털도 없고 팔도 짧은게 머리만 크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진화의 과정을 통해 유전자에 집적된 정보들에 의해 결정된다. 특정한 자극에 대해 특정한 반응을 보이도록 설계된 신경다발이 다시 오류에 의해 오작동을 일으키며 수많은 가능성들이 만들어진다. 이성이란 단지 착각이다. 그럼에도 단지 그렇게 믿고 싶기에 인간들은 이성이 존재한다 믿는다. 그 이성에 의해 사고하고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런 바람들이 실제 인간을 이성적이게 보이도록 만들기도 한다. 어쩌면 이런 것이 이성인 것은 아닐까.


그래서 누군가 말한 것이다. 인간이란 땅위를 걸으면서 하늘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라고. 사실은 아니다. 많은 동물들이 땅위를 걸으면서 하늘을 볼 수 있다. 다만 그 하늘이 그 하늘이 아닐 뿐이다. 현실을 딛고서 현실을 벗어난 이상을 추구하다. 자신이 가지지 못했기에 결여된 것을 갈망한다. 인간이 이성을 소망한다는 것은 그만큼 스스로가 이성적이지 못함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이성적이고자 한다.


현실이 이러니까. 사실이 이러니까. 그런 것이 결국 한계일 테니까.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인간의 위대함은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데에 있다. 아마 김태원이 알고서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닐 것이다. 많은 인류학자들도 그렇게 이야기한다. 호모사피엔스는 미쳤다. 다른 많은 생물들은 위험을 만나면 회피하거나 도망친다. 감히 맞서서 도전하지 않는다. 오로지 새끼들만이 그런다. 아무것도 모르는 새끼들만이 위험한지도 모르고 덤비다가 어이없이 천적에게 목숨을 잃고는 한다. 어느 정도 자라면 위험을 알고 위험을 피하는 법을 안다. 그런데 오로지 인간만이 위험을 알면서도 그것에 도전할 줄 안다.


그래서 신도 만들어냈다. 신이 존재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신이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절대이고, 신성이며, 정의이고, 선이다. 법칙이고 규범이다. 서양에서 일찍 이성이 발명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성이 신의 자리를 대신한다. 인간이 신의 역할을 대신한다. 그것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존재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무모하다. 무식하다. 현실을 모른다. 현명하지 못하다. 그러나 누군가는 가야만 하는 길이다. 태초에 처음으로 아프리카를 지나 아시아로 들어섰던 어느 원시인류가 그랬던 것처럼. 막막한 바다를 건너 저 말리 남국의 섬들로 흩어졌던 어느 호모 사피엔스가 그랬던 것처럼. 처음이었다. 오로지 호모사피엔스만이 바다를 건너 미지의 세계로 나갈 용기를 지녔다. 그런 최초 누군가의 무모함이 지금의 인간을 만들었다. 인간의 문명은, 인간의 위대함은 그렇게 인간 자신에 의해 지금껏 만들어져왔다.


그냥 체념이다. 그냥 절망이다. 그냥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 본능에 굴복한다. 자신의 욕망과 충동에 굴복한다. 지금 이대로도 좋다. 지금 이대로도 상관없다. 단지 그것을 자신의 지성으로 가리려 한다. 휘황한 수사에 가려 그 본질은 묻히고 만다. 어쩌면 이것이야 말로 이성이다. 이것이야 말로 지성이다. 영리하고 현명하다. 어느새 세계는 지성과 문명이라는 이름의 무지와 야만이 지배하게 된다. 인간의 역사였다. 가장 위험했던 시대가 바로 무지와 야만이 지성과 문명의 이름을 빌었던 그 무렵이었다. 불과 얼마전이었다.


가끔 일부러 글을 쓰면서 노골적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혹시나 이 또한 기만은 아닌가. 자신이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감정을 걸러낸다. 더 선명한 감정을 통해 자신의 사고와 판단으로부터 충동과 본능을 걸러낸다. 그러고도 아직 갈 길은 멀다. 다만 그런 노력들이야 말로 일찍부터 이성을 추구해왔던 인간의 본능이며 갈망이었을 것이다. 평생을 이루는 것이지 완성된 것은 아니다. 최소한 자기를 속이거나 자기에 도취되지 않는다. 논리에 빠져들지 않는다.


그러면 인간은 반드시 이성적이어야 하는가. 물론 아니다. 말했듯 인간은 처음부터 이성적이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정의로울 이유도 도덕적일 이유도 없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얼마든지 - 아니 오히려 더 현실을 잘 살아가고 있다. 다만 인간의 존엄함은 더 가치있는 고귀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욕망에 있다. 본능에 있다. 존엄하지 않아도 인간은 인간이다. 인간일 뿐이다. 항상 말하듯. 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