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회

기자들의 수준과 창의력의 이유...

까칠부 2016. 3. 14. 02:25

인간의 진보는 '호기심'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궁금해하는 것이다. 묻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 답을 듣지 못하면 스스로에게 묻고 스스로 답을 찾아 나선다. 그 무모함이 인간을 지금의 존재로 만들었다.


하기는 그래서 어른들은 말할 것이다.


"그런 것 해서 밥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


그래서 한국인 가운데 처음으로 남극이나 북극에 발을 디딘 사람이 없는 것이다. 세계최초가 없는 것이다. 안전하게 남이 간 길만 따라갔으니까. 이미 검증된 길로만 무리없이 따라가려 했으니까. 성과가 나오지 않는 연구는 지원하지 않겠다. 성과가 확실하게 나오려면 이미 성과가 나와 있는 연구를 해야 한다.


물을 필요가 없다. 스스로 답을 구할 필요가 없다. 그럴 시간에 이미 답이 나와 있는 문제를 찾아 답을 따라 쓴다. 이미 나와 있는 답을 찾아 문제에 붙인다. 그러는 쪽이 더 쉽고 빠르다. 더 편하고 효율적이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자신만의 길을 찾는 노력은 사라지고 만다.


기자들이랍시고 인터뷰하는 것 보면 가관도 아니다. 아니 기자만이 아니다. 리포터라는 것들 질뭇하는 것 보면 리포터의 문제인지, 아니면 작가의 문제인지. 왜냐면 물어본 적이 없으니까. 스스로 궁금한 것을 찾아서 답을 구하려 노력해 본 적이 없으니까. 그래서 편하게 남이 했던 질문을 따라한다.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만한 뻔한 질문만을 반복한다. 실패만 하지 않으면 돼.


다시 정치얘기로 넘어갈 뻔했다. 그래도 최악은 막아야지. 그래서 항상 이 모양이다. 실패를 하면 거기서 교훈을 얻으면 된다. 최악으로 떨어지면 그로부터 더 나은 답을 찾아 올라가면 된다. 실패를 두려워하기에 스스로는 한 발도 나가지 못한다. 스스로 멈춰선 채 마라죽어간다. 이건 또 경제이야기일까?


과거 '남자의 자격'에서 김국진이 한 말이 있다. 아이들은 넘어지는 회수 만큼 빠르게 걷는 법을 배운다. 넘어지는 회수만큼 다시 빠르게 뛰는 법도 배운다. 넘어지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아이들은 결코 걸을 수 없다. 결코 뛸 수도 없다. 새끼고양이가 스스로 사냥을 할 수 있도록 어미고양이는 곁에서 얼마든지 실패할 수 있도록 지켜본다. 그러고보면 당시 김국진의 강의에 비판적이던 이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 현실에 안전바가 어디 있느냐는 것이었다. 부모도, 선생도, 사회도, 국가도 누구도 안전바가 되어 주지 않는다.


이야기가 멀리 갔다. 쌓여온 이야기다. 그래서 전부터 이야기했었다. 기자가 지식인이던 시대는 이미 끝났다고. 그보다는 어쩌면 기자의 수준이야 말로 이 사회 지성의 수준인 것은 아닐까.


마침내 인간이 컴퓨터에 통렬한 반격을 가한 순간에 들려온 어이없는 인터뷰에 한심함을 금치 못한다. 저런 놈들이 기자다. 언론인이다. 언론의 현주소다. 이 사회의 현실이다. 알고 있어도 익숙해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