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을 가진 이들이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이 바로 자기연민이다. 자기를 불쌍히 여긴다. 자기를 가엾게 여긴다. 자기를 안타깝게 여긴다. 그래서 위로한다. 그래서 변명한다. 자기는 이만큼 힘들고 괴롭다. 이만큼 대단하고 어려운 일들을 하고 있다. 그러니 어쩔 수 없다. 그래야만 했었다. 그런 자신을 알아달라. 차라리 몰라주는 다수를 원망하게 된다.
반촌사람들과 아주 모르는 사이도 아니다. 아직 정도전의 제자이던 시절 같은 꿈을 꾸며 같은 목표를 향해 함께 움직이기도 했었다. 잠시지만 자신을 위해 일했던 때도 있었다. 무엇보다 반촌의 행수가 바로 분이(신세경 분)이였다. 그런데도 어쩔 수 없다. 그것이 정치다. 그것이 권력이다. 그것이 자신의 길이다. 자신의 위치다. 그래야만 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니 알아달라. 자신도 충분히 아프고 슬프다. 반촌사람들의 구명을 부탁하는 무휼(윤균상 분)을 향해서도 그러니 그럴 수 없다. 떠나려는 무휼과 분이를 오히려 원망한다. 어째서 그들이 이런 자신을 떠나야만 하는 것인가. 어째서 그런 자신을 몰라주는가.
하기는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이방원(유아인 분)은 그동안 그토록 간절히 권력을 가지기 위해 애써왔던 것이기도 했다. '삼국지'에서 조조가 아버지의 친구인 여백사의 일가를 오해로 모두 죽이고 여백사마저 살해한 뒤 동행하던 진궁에게 그리 말했다고 한다.
"내가 천하를 버릴지언정 천하가 나를 버리게 하지는 않겠다."
권력이란 에고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지독한 에고다. 내가 이해하기보다 나를 이해시키고 싶다. 내가 알기보다 나를 알게 하고 싶다. 오로지 자신의 일방적인 욕망과 의지만을 모두에게 강요하고 강제하고 싶다. 그래서 정도전과 같은 제도와 정책들을 지향하면서도 끝내 정도전과 함께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정도전이 추진하던 정책들을 이어받아 행동에 옮기면서도 다른 사람의 의견은 듣지 않는 오만과 독단만을 보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로인해 이토록 외롭고 고단한 처지가 되어 버린 자신은 너무 가엾고 불쌍하기만 하다.
전작 '뿌리깊은 나무'에서 세종이 임금인 자신의 마음을 지옥이라 표현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물론 힘들다. 나라의 모든 중요한 일들을 오로지 자신이 책임지고 결정해야 하는데 외롭지 않을 리 없다. 그러나 그런 생각에 빠지는 순간 임금은 자신의 길에서 벗어나게 된다. 자신의 선의를 알아주지 않는 백성들을 원망하고, 자신의 믿음대로 따라주지 않는 신하들을 미워한다. 나라와 백성을 위한다지만 정작 마음속에 나라도 백성도 없고, 신하들과 함께하면서도 머릿속에는 신하 또한 없다. 오로지 일방적인 왕 개인의 의지만이 실체없는 공허 위에 날뛰기 시작한다. 폭군이니 혼군이니 암군이니 하는 것들이 나타나게 되는 이유다.
임금이 인간의 마음을 가지는 순간 바로 나라는 어지러워지고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진다. 임금이 인간으로서 자신의 욕망과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순간 나라안의 모든 것이 그에 휘둘리게 된다. 임금은 혼자이지만 결코 혼자가 아니다. 그래서 더욱 혼자가 되어야 한다. 임금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 심지어 임금 자신의 것도 아니다. 유가에서 말하는 왕도정치의 요체다. 그 극단에 있는 것이 정도전이 주창했던 재상총재제였다. 임금에게서 인간을 배제한다. 물론 결코 쉽지 않다. 아니 거의 불가능하다. 역사상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임금들이 있었지만 정작 모두로부터 임금으로 인정받는 경우는 매우 드문 것은 그래서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자신의 모든 감정과 욕망을 부정하고 억눌려야 하는데 그 마음이 평화로울 리 없다.
그래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스스로를 연민하는 사이 실제로 고통받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스스로 괴로워하는 것보다 더 절망적인 처지에 놓인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오래전 이방원이 부탁한대로 분이가 자칫 자신을 삼킬 뻔하던 벌레로부터 그를 구해준다. 지금의 자신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과연 무엇이 되어 있는가. 무휼이 떠나고 분이마저 떠나려 한다. 항상 당당하던 분이가 차라리 자신과 기꺼이 혼인하겠다 대답한다. 오히려 비참하다. 그것은 사랑도 우정도 무엇도 아니었다. 철저한 거래였다. 굴복이었다. 그러나 분이는 자기에게 그런 사람이어서는 안된다. 분이에게도 자기가 그런 사람이어서는 안된다.
다만 처음 두 사람을 떠나보낼 때는 단지 체념에 불과했다. 죽어 자신을 떠난 조영규처럼, 자신을 두려운 눈으로 보는 친형 이방과처럼, 자신을 혐오의 눈빛으로 보던 숙부 이지란처럼, 그마저도 없이 무심하게 등돌린 아버지 이성계처럼. 그러니까 무휼도 분이도 이대로 자신의 곁을 떠나는 것이다. 정도전과 남은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떠나보내는 것이다. 이제 자신은 혼자다. 혼자서 강해질 것이다. 다짐처럼 각오처럼 그렇게 모두를 떠나보내려 한다.
그러나 거짓이었다. 무휼이 마지막 용으로 등장하는 이유였다. 이방원을 왕으로 만들기 위한 마지막 열쇠였다. 떠나는 순간에도 무휼은 자신의 신하였고, 분이는 진심으로 자신을 염려하고 있었다. 혼자가 아니다. 마음을 지탱하는 단단한 기둥이 되어 준다. 자신을 지켜보고 지켜주는 누군가가 있다. 외롭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힘을 낼 수 있다.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 사람은 얼마든지 용기를 낼 수 있다. 무휼이, 그리고 분이가 이방원을 지키는 것은 칼이 아닌 그 마음이었다. 오로지 사람만이 진정으로 사람을 지킨다.
복수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죽은 이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살아있는 자신을 위한 것인가. 어차피 복수를 한다고 죽었던 사람이 살아돌아오지는 않는다. 그냥 이미 죽은 사람들 위에 새로운 죽음만을 더할 뿐이다. 길선미(박혁권 분)는 죽은 동생 길태미를 빌어 이방지(변요한 분)에게 충고한다. 복수를 위해 무명을 찾아나선 척사광(한예리 분)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이야기다. 길태미의 죽음에 후회란 없었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살았기 때문이었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칼을 휘둘렀고 마침내 그 칼 위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래서 복수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하며 누구를 위해 살 것인가.
척사광과 이방지 둘 모두 다음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무명을 제거하고 이방원을 죽이고 난 뒤의 일따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눈앞의 복수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비로소 이방지의 눈이 이방원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향하게 되었다. 그토록 애써 외면해왔던 어머니를 지키기 위해 이방원을 버려두고 척사광의 앞을 막아선다. 다음이 생겨났다. 어머니를 지킨다. 원래 산다는 것이 그렇다. 복수가 전부인 것 같아도 결국 어떻게든 자기가 살아갈 이유를 찾아내게 된다. 척사광에게도 그럴 기회가 주어지게 될까. 그녀의 절망적인 싸움은 증오보다 차라리 허허롭기만 하다.
무명이 이방원을 살해하기 위해 파놓은 함정은 어째서 그동안 중요한 액션들이 밤에 이루어지고 있었는가 넘치도록 이해하게 만들어주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맨몸으로 달려가는 무사들의 모습이 어색하기보다 궁색하다. 밝은 햇빛 아래서 보여지는 몸놀림은 희미한 어둠속에서 보이던 것과 분명 달랐다. 연출도 그다지 짜임새있지 못했다. 한국드라마의 제작현실을 이해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척사광과 이방지, 무휼과 길선미의 대결이다. 고수의 대결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무명의 무극이 아닌 어머니 연향(전미선 분)은 자식들을 위해 육산선생(안석환 분)에게 복수하려 하고 있었다.
"그런 걸 이해해서는 안되잖아요."
반촌의 사람들을 잡아가서 고문하는 이방원과 조정의 행동을 이해해야 한다는 무휼의 말에 분이는 단호하게 반박한다. 당연하다. 자신들의 사정이 아니다. 자신들의 이유가 아니다. 오로지 권력의 사정이고 권력자의 이유다. 죽임을 당하는 쪽이다. 억울하게 잡혀가서 고통을 겪어야 하는 쪽이다. 이해하는 순간 죽는다. 이해하려는 순간 죽어야만 한다. 그것이 권력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전작 '뿌리깊은 나무'에서 정기준이 세종에게 했던 말과도 이어진다. 백성은 어리석기에 무서운 것이다. 어느새 애국심을 배우고 충성을 배우며 기꺼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그를 따르려 한다. 백성은 복종하되 누구도 따르지 않으며 오로지 살아남는 것을 그 근본으로 여긴다. 이방원을 만나는 순간에도 그것은 변함이 없다.
그토록 따르던 정도전마저 저버렸다. 오라비 이방지마저 돌아보지 않았다. 이방원을 구한 것은 순전히 오해였다. 척사광이 이방원을 죽이려 하는 줄 알았다. 척사광으로부터 이방원을 구한 것이 어미와 오라비로부터 이방원을 구한 것이 되고 말았다. 정도전을 따르던 마음도 진심, 오라비를 아끼는 마음도 진심, 이방원을 살리려는 다급한 마음도 모두 진심이다. 어느것도 선택하지 않는다. 선택해야 하는 순간 분이는 무엇도 선택하지 않는다. 이해하려고도 않고 이해를 구하려고도 않는다. 저들은 자신들과 다르다. 자신과 다르다. 이방원을 살린 선택이 그래서 더 아리게 다가온다. 인내하고 인내하며 그녀는 살아남으려 한다.
뜻밖에 이방원의 정반대편에 무휼의 할머니 묘상(서이숙 분)이 있었다. 자신의 야망을 위해 피를 나눈 형제마저 자신의 손으로 베었을 때 묘상은 손자를 위해 전혀 상관없는 그의 대업을 돕고 있었다. 그들을 미워해서는 안된다. 그들을 이해해야만 한다. 차라리 우리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떠나도록 하자. 이방지를 친손자처럼 아끼던 마음 그대로 반촌사람들의 원망마저 모두 품어안으며 자기가 떠나기로 한다. 피와 어울리지 않는다. 욕망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분이와는 또 다른 이유로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살아간다. 그 묘상이 무휼을 이끈다. 무휼을 떠나게 한다. 그래도 무휼은 이방원을 구하기 위해 달려간다.
권력을 가진 이후를 그린다. 왕이 되기까지의 과정이다. 이방원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이유다. 인간으로서 권력을 잡고 장차 인간을 넘어선 왕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 아직 모든 것이 부족하고 불안하기만 한 새로운 나라를 반석위에 올릴 누구보다 강력하고 뛰어난 왕이다. 고민하고 갈등한다. 혼란에 빠져 방황도 한다. 흔들림 없이 앞으로 나간다. 왕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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