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려요! 당신은 의사로서 당신의 일을 해요! 죽여야 할 상황이 되면 죽이는 건 내가 할 테니까!"
어떻게 그런 상황에 이런 대사를 생각해 낼 수 있을까? 소름이 끼쳤다. 괜히 있기있는 것이 아니다. 괜히 인정받는 것이 아니다. 그런 대사를 생각해낼 수 있는 작가와 그 대사가 너무나 잘 어울리는 배우를 보며 새삼 드라마를 보게 된 것이 행운이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처음 유시진(송중기 분)이 강모연(송혜교 분)으로부터 거절당할 때 들었던 이유에 대한 답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자신의 직업으로 인해 고민하는 강모연을 향한 자신의 답이기도 했다. 당신이 마음놓고 의사로서 살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자신은 누군가를 죽이는 일을 하는 것이다. 의사는 사람을 살려야 하고, 만일 살아난 사람이 죽어야만 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그 역할을 맡겠다. 바로 내가 당신을 지키겠다.
단순히 강모연이라고 하는 한 인간, 혹은 한 여성의 신체적 안전만을 지키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강모연이라고 하는 개인을 이루는 모든 가치와 양심, 신념, 정체성, 한 마디로 존엄을 자신이 지키겠다는 것이었다. 의사로서 자신의 신념과 양심을 배신하지 않도록 만들겠다. 절대 어떤 경우에도 후회하도록 만들지 않겠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누구와도 총을 겨누겠다. 생명이 위독한 아랍의 요인을 수술할 때 그랬던 것처럼. 그러니 자신을 믿고 따라오라.
그래서 한 가지 불만이다. 너무 일방적이다. 오로지 유시진만이 일방적으로 강모연에게 다가간다. 오로지 솔직하고 오로지 진심이다. 지뢰밭을 빠져나오면서도 강모연은 유시진의 뒤를 쫓을 뿐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유시진의 뒤에 숨어 판단을 미룬다. 살려야 하는가. 살려서는 안되는 것 아닌가. 갑자기 관습적 의미의 나약한 여성으로 돌아가 버린다. 유시진을 향한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순간 그냥 약한 '여자'가 되어 기대려고만 한다. 유시진을 지키려던 의사 강모연은 어디론가 사라진다. 물론 이대로 끝은 아닐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어쩔 수 없이 피할 수 없으면 도망치는 수밖에 없다. 도망치는 것도 안된다면 싸워야 한다. 싸울 수 없으면 포기해야 한다. 하필 우연한 사고처럼 자신의 솔직한 감정이 방송을 통해 주둔지의 모두에게 알려지고 말았다. 미처 대비할 시간도 없이, 마음의 준비를 할 여유조차 없이 갑작스럽게 그녀가 쓰고 있던 가면이 벗겨지고 말았다.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기정사실이 되어 있는 그것을 정면으로 부정하거나 아니면 인정해야만 한다. 유시진에게 그랬던 것처럼 어설프게 피하거나 도망쳐서는 더 곤란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그런데 더이상 도망칠 곳도 없이 단둘이 차안에 있었고, 더구나 함께 위험한 지뢰밭을 헤쳐나오며 그에게 전적으로 기댈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싸우지 못하고 지레 항복해 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지뢰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천천히 가는 겁니다!"
지금껏 그래왔었다. 최소한 유시진 자신 만큼은. 때로 잠시 멈추거나 뒤로 물러나는 경우는 있어도 앞으로 나가기를 포기한 적은 없었다. 한결같이 강모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문제가 없었다. 언제 어느때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항상 피하고 도망치려고만 했던 탓이 갑작스럽게 솔직해지게 되었을 때 정작 강모연에게는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유시진을 지키겠다는 각오마저 사라졌다. 먼저 다가고 먼저 이해하겠다는 결심마저 사라졌다. 그만큼 유시진이 편하다. 든든하다. 피로해진다. 이쯤에서 자신 역시 편해지고 싶다.
하지만 역시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유시진이 자신을 위해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면 강모연 역시 유시진을 위해 누군가를 살려야만 한다. 그래야 균형이 맞다. 그리고 두 사람이 있는 우르크는 위험이 항상 함께하는 곳이다. 당장 홍역에 걸린 아이의 안내를 받아 두 사람이 찾은 마을조차 일대의 범죄조직이 관리하는 도깨비마을이었다. 그곳에서 팔려갈 처지에 놓인 한 소녀가 유시진의 옛동료이자 범죄조직의 보스인 아구스(데이비드 맥기니스 분)를 총으로 쏘았다. 진영수(조재윤 분)가 범죄조직에게 넘기기로 한 다이아몬드를 빼돌리며 아구스의 조직원들이 그를 찾아나선 것도 또 하나 불안요인이다. 사람을 죽이는 군인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사람을 살리는 의사가 더 필요하다.
드디어 서대영(진구 분)도 윤명주의 아버지인 사령관(강신일 분)으로부터 윤명주와의 교제를 허락받는다. 단, 전제조건이 붙었다. 부사관인 사위는 보고 싶지 않다. 자신의 딸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되어주기를 바란다. 파견이 끝나는대로 군복을 벋고 윤명주의 외가쪽 회사에 들어가 일을 배우라. 걸맞는 사회적 지위를 갖추라. 하기는 평생 군인으로 살 것이 아니라면 언젠가는 군을 떠나야만 한다. 정보가 부족하다. 서대영이 군을 어떻게 여기는지. 군을 떠나는 것에 대해 평소 어떻게 생각해왔는지. 그것이 과연 서대영에게 양보이고 희생일 것인지.
그러고 보면 그런 점에서도 유시진은 한결같다. 에두르지 않는다. 피하지도 않는다. 강모연이 자신의 직업을 불안해하고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군을 떠나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혀 염두에도 두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자신을 받아들여달라. 인정해달라. 어린아이 같다. 한 편으로 확신이다. 자신과 강모연을 믿는다.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윤명주와의 스킨십조차 소극적인 서대영과 비교된다. 성장과정이나 주위환경의 차이도 있다. 천천히 간다. 이제 서대영은 선택해야 한다. 어쩌면 선택이 아닐지도 모른다.
유시진과 강모연의 키스가 끔찍하도록 달달했다. 대단하게 에로틱하다거나 간절한 느낌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당연하게 해야 할 키스를 하는 것처럼 여상하게 느껴졌다. 지뢰밭을 빠져나와 돌아오는 길에 얻어탄 농부의 트럭 짐칸에서 그동안 간지럽도록 비껴가기만 하던 서로의 진심을 확인한다. 사령관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갑작스레 질투를 쏟아내기 시작한 강모연의 입을 막겠다며 유시진은 다시 장난스럽게 기습키스를 시도한다. 한 번의 짧은 입맞춤과 이어지는 그보다 더 진한 키스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마치 오래된 연인의 그것처럼. 굳이 어떤 설레임조차 없이 이어지는 키스가 오히려 더 보는 이들을 설레게 한다. 이들은 정말 - 특히 유시진은 정말 강모연을 좋아하고 있구나. 이 순간을 행복해하고 있구나.
하지만 역시 너무 한 쪽으로 쏠려 있다. 물론 여전히 유시진은 드라마의 중심이다. 남자마저 반하게 만드는 유시진의 매력이야 말로 드라마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대로는 짐이 너무 무겁다. 돌보미가 되어서는 안된다. 보디가드가 되어서도 안된다. 대칭이 이루어져야 한다. 유시진이 멋있는 만큼 강모연도 멋있어야 한다. 판타지의 완성이다. 과연 아구스가 두 사람의 눈앞에서 총에 맞고 쓰러지는 장면이 이후 두 사람에게 어떤 사건들로, 어떤 영향으로 돌아오게 될까. 아직 서대영과 윤명주의 사이도 끝난 것은 아니다. 이제 겨우 절반을 지나온 자체가 쉽게 끝낼 생각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확실히 이기적일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귀하게 자라온 경우로 보였다. 이치훈(온유 분)의 선의는 해맑다. 너무 깨끗해서 쉽게 더러워진다. 의사도 사람이다. 사람은 누구나 욕망을 갖는다. 당연한 사실들을 인정한다. 그 위에 자신이 바라는 진짜 자기를 만들어간다. 사람은 살아있는 동안이 모두 성장기다. 지켜보는 이유다. 의외로 흥미로운 주제를 담고 있다. 재미있다.
http://www.stardail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9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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