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마스터 국수의 신 - 김길도의 악과 잔인한 4월의 자화상

까칠부 2016. 4. 29. 04:41

관객이 작품속 악역에 반응하는 자기안의 악의가 반응하는 것이다. 자신도 미처 모르고 있던 그늘과 그림자를 비추는 거울이라 할 수 있다. 평소 억눌러왔던, 혹은 애써 감추고 속여왔던 본능이 그를 통해 일깨워진다. 차라리 악역이 저지르는 악행들이 통쾌하기까지 하다. 악역을 막아서는 선역을 때로 미워하고 때로 원망하기도 한다. 그래서 많은 경우 마침내 악역에게 가해질 징벌과 응징은 그런 자신을 위한 변명이기도 하다. 나는 악이 벌받을 것을 알고 있었다.


하필 4월이다. 2년 전 차마 떠올리는 것조차 에이도록 아프고 괴로운 참혹한 비극이 잔인한 4월에 있었다. 많은 이들은 안전불감증이라 말했었다. 필자는 다른 모든 가치보다 오로지 돈만을 우선하는 배금주의가 원인이었다 말한 적 있었다. 돈만 벌 수 있으면 승객의 안전따위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자기의 책임이고 의무임에도 단지 얼마간의 돈을 받고 아무렇지 않게 무시하고 지나간다. 수백의 생목숨이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어이없이 사라졌는데도 또한 많은 이들이 단지 남은 가족들이 받게 될 보상에만 관심을 보이던 것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의 호흡기로 들어갈 제품인데도 전혀 그에 대한 최소한의 연구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간단한 실험으로도 사실을 확인할 수 있고 실제 그렇게 유해성이 입증되고 있기도 했었다. 하지만 갓태어난 아이들까지 무려 수백의 목숨이 사라진 사건인데도 책임지는 사람 없다. 오히려 항의하는 피해자와 가족들을 협박하고 회유하며 책임을 회피하려는 모습들만 보이고 있다. 그런데도 그들에게 법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수단 자체가 너무 허술하다. 기업이 잘되어야 나라도 잘된다. 나라가 잘살아야 개인도 잘산다. 기업활동을 저해하는 규제는 곧 악이다. 과연 무엇이 다를까? 더 많은 돈을, 더 큰 욕망을 위해 태연히 사람을 속이고 죽이는 드라마의 악역 김길도(조재현 분)의 그것과.


강남의 어느 빌딩 옥상에서 어느새 고층빌등으로 가득한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그곳에 자신의 성을 세울 계획에 들뜬 김길도를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야말로 어쩌면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 아닌가. 지금까지 이 사회가 걸어온 시간들이 아닌가. 일제강점기라는 치욕의 역사가 있었다. 한국전쟁이라는 참혹한 기억도 있었다. 오랜 가난을 지나왔다. 어떻게든 잘살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타인을 속이고, 주위를 해치고, 그래서 범죄를 저질러도 돈만 벌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선이고 정의였다. 돈 10억만 벌 수 있다면 기꺼이 감옥에도 갈 수 있다는 아이들의 설문조사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었다. 그런데도 그렇게라도 했으니 이만큼 사는 것이라며 스스로 공치사한다. 자신들은 틀리지 않았다. 딱 김길도가 자신의 장인이기도 한 고대천(최종원 분) 앞에서 했던 말이다.


오히려 보살펴야 할 고아원 아이들일 착취하는 원장의 모습도 그런 연장에 있을 것이다. 하기는 다른 많은 영화나 드라마 등을 통해 보았던 악덕 고아원장들에 비하면 차라리 귀여운 수준이라 할 수 있다. 아이들에게 돌아가야 할 정부의 보조금이나 독지가들의 기부마저 개인의 욕망을 위해 빼돌려 사용한다. 추위속에 아이들을 방치하고, 먹이는 것마저 줄이며, 아마도 폭력까지 곧잘 휘둘러 온 듯하다. 무명(천정명 분)이 분노하고 채여경(정유미 분)이 반발한다. 결국 많은 드라마들은 벌써부터 세대간의 갈등과 대립을 그려오고 있었다. 죄를 짓는 것은 항상 어른들이다. 그로 인해 고통받는 것은 바로 힘없는 아이들이다. 그 분노와 원망이 끝내 기성세대를 겨누는 복수라는 이름의 칼날로 벼려지게 된다.


그래서 한 편으로 경고하고 있는지 모른다. 김길도의 정체가 탐욕이라면 주인공 무명의 정체는 증오다. 김길도가 자신의 탐욕을 위해 자신마저 저버렸듯 무명 역시 김길도를 향한 복수심에 자신을 잃어버리려 한다. 방황한다. 혼란에 빠진다. 부모를 죽인 원수였다. 아버지로부터 모든 것을 훔치고 빼앗아 자기 것으로 만든 용서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무엇을 할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김길도에게 복수하려 굳이 마산까지 찾아간 상황에서도 그저 막연하기만 했다. 복수를 해야겠다는 생각조차도 없이 오로지 두리번거리며 김길도를 찾아나설 뿐이었다. 그래서 김길도에게 복수를 한다고 자신이 바라던 것이 이루어지는 것인가. 아니 그것은 진정 자신이 바라던 꿈이고 목표였는가.


교복을 입은 천정명이며 정유미가 너무 어색하다. 드라마에서 아역이 필요한 이유다. 한참의 노력 끝에 겨우 그들의 나이를 인정할 수 있었다. 앞으로도 계속 이들이 드라마를 이끌어가야 할 테지만 자칫 몰입을 흐트리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었다. 더구나 너무 길었다. 아직까지는 주인공이 쓰러뜨려야 할 악역 김길도가 중심이다. 모두가 달려들어 쓰러뜨려야만 하는 적이기에 그 존재부터 완성되어야 한다. 나머지 인물들의 이야기는 그와의 싸움 과정에서 조금씩 완성되어간다. 벌써부터 주인공들이 자신의 얼굴로 등장했어야 했는가 필요에 대한 의문이다. 가끔은 시청자를 위한 배려라는 것도 필요하다. 세월의 차이가 너무 크다.


그것이 옳거나 그르다는 판단조차 없었다. 그런 고민마저 없이 지금껏 오로지 앞만 보며 지나쳐 왔다. 새삼 자신의 앞에 장애물이 나타났을 때 그를 부수고 짓밟아서라도 그저 앞으로 나가려는 생각만을 한다. 차라리 자신을 칼로 찌르는 것보다 자신의 돈을 잃는 것이 더 아프다. 지난 회차에서 느낀 그대로다. 고통의 시간들이 김길도로부터 자신마저 지워버렸다. 자신마저 죽여버렸다. 흔히 악역들에게서 보이던 연민을 느끼게 만드는 비감함마저 없었다. 추악한 그대로 악 자체였다. 섬뜩하기보다 그리웠다. 김길도만이 보인다.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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