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전개가 느리다. 마이페이스다. 일단 하고 싶은 이야기부터 하고 나서 듣고 싶은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모양이다. 제목이기도 한 국수가 궁금하고 주인공 무명(천정명 분)의 복수가 궁금한데 친구들의 이야기로 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그들이 어떻게 살았고 어떤 식으로 성장하는지. 20부작이면 충분한 것 같아도 모든 이야기를 다 하려면 항상 부족한 것이 시간이다.
하필 주인공인 무명과 무명의 원수인 악역 김길도(조재현 분)가 얼마간의 사이를 두고 차례로 과거와 마주하는 장면이 흥미로웠다. 다시 돌이키기조차 싫은 과거였다. 돌아가려 해도 돌아갈 수 없는 과거였다. 스스로 떠나왔고 필사적으로 멀어지려 발버둥쳐 왔었다. 억지로 내쫓겼고 근처에만 가도 자기를 해치려는 이들이 뒤쫓고 있었다. 보상받아야 했다. 고통스럽고 비참했던 만큼 반드시 그만한 보상을 받아내야만 했었다. 되찾아야만 했다.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자신이 잃어버린 시간들을 돌려받아야만 했었다. 그러나 결론은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과거를 위해 현재를 살아야 한다.
인간이 늙기 시작하는 것이 미래에 대한 기대나 희망보다 과거에 대한 미련과 향수가 더 강해질 때라고 한다. 현재란 내일을 향한 길이다. 현재를 산다는 것은 내일을 향해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의 자신의 삶이 내일의 자신을 결정한다. 그렇다면 자신은 내일을 위해 오늘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러나 어차피 앞으로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면 내일을 걱정하기보다 즐거웠던 기억들을 떠올리며 오늘을 만족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삶이란 내일로 가는 과정이 아닌 과거의 연장이다. 그러고 보면 확실히 사랑보육원의 네 친구 가운데 유일하게 무명만이 과거에 사로잡힌 채 살고 있다. 채여경(정유미 분)이든, 박태하(이상엽 분)든, 고길용(김재영 분)이든 하나같이 내일의 목표와 꿈을 오늘의 이유로 삼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내일이 없는 삶이다. 과거에 사로잡힌 삶의 망령이다. 어쩌면 그래서 무명과 김길도는 닮은 것인지 모르겠다. 과거를 위해 복수해야 하고, 과거를 극복하기 위해 악을 서슴지 않아야 한다. 자신을 잃은 채 살아간다. 무엇이 진정 자신을 위하는 것이고 자신이 간절히 바라는 것인지. 삶에 속는다. 기억에 속는다. 자신이 자신을 속인다. 그렇게 정당화한다. 자신의 오랜 꿈이 이루어지려는 순간에. 비로소 기억이 아닌 현실과 마주하게 된 바로 그 순간에. 부모의 유골함을 발견한 순간 기억은 의심도 부정도 할 수 없는 확고한 사실로써 자리잡느다. 책임이었다. 의무였다. 무엇보다 자신이 받아내야 하는 빚이었다. 동기가 확실해진다. 지금껏 무명의 행동이 느슨했던 것은 아직 실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원수라고 하는 확신이 필요했다. 내일을 담보잡고 과거를 위해 복수에 나서야만 한다.
아마 그래서이지 않았을까. 시시콜콜한 이야기들까지 빼곡이 채워넣으며 지루하게 지금까지 끌어왔던 것은 말이다. 드라마의 시간에서도 과거였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시작된다. 과거를 만든다. 과거를 쌓아간다. 장차 무명과 채여경, 박태하, 고길용 들을 구속할 과거의 족쇄다. 그래서 한 편으로 슬프다. 내일에 대한 꿈과 기대보다 오로지 과거의 기억에만 사로잡혀 살아야만 한다. 무명의 시간은 그나마 과거로 흐르고 있었다. 겨우 현재까지 지나온 시간들이 부모의 유골을 찾으면서부터 빠르게 원한을 품은 과거의 시간으로 달려간다. 우울해지는 이유다. 오로지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비롯된 원망과 증오와 분노라는 부정적 감정만을 내내 강요당한다. 즐거워야 할 먹는다는 행위마저 그런 감정들에 구속당한다. 그나마 복수에 성공한다면 비례해서 그만큼 통쾌하기는 할 것이다.
어떤 이야기들은 산만하다. 어떤 이야기들은 제대로 완결조차 되지 않는다. 역시 자기 하고싶은 대로 중구난방이다. 작가의 의도가 앞선다. 심지어 주인공 무명의 타락마저 무명 자신의 입을 빌어 설명하는 무리수까지 둔다. 드라마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이지 설명을 듣고 아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이야기가 갑작스레 과거의 이야기로 뒤바뀐다. 과거에도 김길도는 한결같았다. 역시 베테랑이다. 그조차 조재현이 연기하는 김길도만 혼자 튀며 그를 고립시킨다. 정작 악행을 저지르더라도 직접적으로 주위에 영향을 미치거나 하지는 않는다. 말 그대로 회상이다. 현재와는 전혀 상관없는 과거의 기억이다. 작가의 욕심이 정돈되지 않은 채 시청자의 눈과 귀로부터 넘치고 만다.
주연을 맡은 천정명의 연기가 아쉽다. 못하는 연기는 아니다. 그러나 한 눈에 각인될만한 매력적인 연기 또한 아니다. 잘하는 연기를 보려는 것이 아니다. 재미있는 이야기와 매력적인 캐릭터를 보고자 하는 것이다. 못하더라도 시청자의 인상에 남을 수 있는 연기가 대중적으로 더 좋은 연기다. 장차 조재현이라는 베테랑과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김길도라는 두드러진 존재감의 악역과 마주해야만 한다. 눌러야 한다. 드라마는 오로지 주인공을 위해 존재한다. 주인공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그래서 주인공이고 주연이다. 타이틀롤이다. 그렇다면 천정명 자신은 무명이라는 인물에게서 어떤 매력을 느끼고 있는가.
과감하게 생략했어도 좋았을 장면들이 적지 않았다. 빠른 호흡으로 시청자가 묻기 전에 먼저 시청자가 궁금해할만한 것들을 들려주는 요령도 필요했다. 너무 많은 것들을 보여주려 하다 보면 정작 아무것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제목이 의미가 없다. 국수는 단지 복수를 위한 도구이자 배경이었을 뿐이다. 어색함을 느낀다. 생각이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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