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표정으로 울고 있었다. 문득 깨닫고 보니 드라마가 시작되고 오해영(서현진 분)은 내내 울고 있었다. 웃으면서도 울고, 화내면서도 울고, 술마시면서도 울고, 울면서도 또 울었다. 가슴이 무너져내릴 것만 같은 아픔과 슬픔에 스스로 무너져내리면서도 끝끝내 꾹꾹 눌러 여미며 아무렇지 않게 견디려 애쓰고 있었다. 어느 봄햇살처럼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녀의 감정에 젖어들고 마는 이유였다. 울 줄 아는 배우다. 아주 예쁘게 울 줄 아는 배우다. 서현진은.
가끔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쳇말로 '꽃히는' 순간이 있다. 말 그대로 각인된다. 인상을 결정짓는다. 아주 사소한 장면이다. 이를테면 아무렇지 않게 강변을 따라 자전거를 달리며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장면 같은 것이다. 세상은 이리도 아름다운데. 자기와는 상관없이 햇살은 맑고 새들은 자유롭다. 봄볕은 따갑고 바람마저 시원하다. 버려진 것 같다. 도저히 섞일 수 없는 자신을 깨닫고 만다. 서러움이다. 문득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 화나고 원망스럽던 기억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그때 자신은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던가. 분명 언젠가 어느 곳에선가 지었던 표정이었을 터였다.
부모로부터도 버려지고 세상은 다 잃은 표정으로 술집에서 맥주를 병째 들이킨다.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무심하게 소란을 피우는 박도경(에릭 분)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때 박도경도 보았다. 오해영도 보았다. 서로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애써 감추고 힘껏 누르고 있지만 결국 비져나오고 마는 슬픔과 아픔의 근원을. 오해영의 슬픔이 박도경의 슬픔을 짓누른다. 오해영의 아픔이 박도경의 아픔을 헤집는다. 차라리 아프다는 말조차 하지 못하게 예리하게 도려낸다. 그래서 주인공이다. 드라마를 정의하는 존재다. 진짜 주인공다운 주인공은 그래서 의외로 매우 드물다. 드라마를 봐야만 하는 이유다.
진짜 운명이다. 전혀 맞출 생각이 없었다. 맞출 수 있을 것이란 기대도 없었다. 오히려 더 거리를 벌렸다. 술까지 취해 걸음마저 비틀거린다. 그런데 맞았다. 자기가 조건으로 내건 과녁판 한가운데 다트가 꽂혀 버렸다. 그저 당장의 혼란스런 상황으로부터 도망치려 내건 조건이었는데 도리어 그것이 행동을 결정지어 버렸다. 전도가 유망하던 사업가는 사기꾼이 되어 감옥에 갇히고, 행복한 결혼을 꿈꾸던 예비신부는 집에서도 쫓겨나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우연치고는 너무 짓궂다. 마치 앞으로 박도경과 한태진(이재윤 분)의 사이를 예고하듯 갈등을 선금으로 지급한다. 혼자가 된 오해영은 떠밀리듯 박도경의 주위를 맴돈다.
박도경에게 지금까지 애써 누르고 있던 이야기들을 마음껏 쏟아낸 오해영이 비틀거리며 위태하게 걷는 것은 박도경이 붙잡아 그녀의 집앞까지 바래다준다.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살아라. 자신을 향한 말이기도 하다. 자신을 향한 위로였다. 하지만 박도경의 이기가 오해영을 살게 한다. 비틀거리던 그대로 결심을 굳힌다. 또다른 인연으로 떠밀린다. 하필 이사간 집에서 판자 하나로 겨우 막아놓은 뒤편 좁은 문 뒤에 박도경의 집이 있었을 줄이야. 피해도 소용없다. 아무리 막으려 해도 박도경이 예지한 그대로 오해영은 그의 앞에 나타난다. 과연 그곳에서 오해영은 눈물을 멈추고 진짜 행복한 웃음을 되찾을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조금씩 가지고 있는 학창시절의 열등감을 자극한다. 자신보다 우월한 존재가 있었다. 우월한 존재로 인해 항상 비교당하며 주눅들어 지내야 했었다. 하필 같은 이름이었고, 같은 학교 같은 학년 같은 반이기까지 했었다. 전혀 다른 인간인데 이름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비교당하며 열등감을 강요당해야 했다. 그러나 이제 혼자서 자기 힘으로 헤쳐온 시간들이 그같은 열등감마저 잊게 만든다. 무심하게 잔인한 동창들 앞에서도 그래서 한껏 자신을 비하하며 웃을 수 있었다. 운명이 그런 두 사람을 다시 만나게 한다.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시청자를 위한 동기부여이기도 하다. 주인공을 따라가는 편이 아무래도 모두를 위해서도 좋다.
페이소스란 긍정이다. 어떤 아픔도 슬픔도 노여움도 웃음으로 넘길 수 있는 여유이고 강함이다. 차라리 춤을 춘다. 느닷없이 뛰쳐나와 춤을 추는 딸의 옆에서 어머니도 함께 춤을 춘다. 이해할 수 없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 하지만 웃어야 한다. 살아야 한다. 짐짓 강한 척 자신의 상처를 드러낸다. 풀밭에 구른 채로 자전거를 어깨에 매고 민망한 모습으로 동네를 활보한다. 웃기려 하지 않아서 더 웃게 된다. 웃을 수밖에 없기에 오히려 그녀의 아픔에 공감한다. 속옷을 드러낸 부끄러움조차 그녀에게는 이미 대수롭지 않다. 슬픈데 웃기다. 웃긴데 슬프다.
설득당하고 만다. 실재하는 사실이다. 허구가 아닌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의 실체다. 오해영이 되어 있다. 오해영보다 더 오해영이 되어 있었다. 아직 박도경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있는 채다. 오로지 오해영을 중심으로 모든 이야기들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며 어느새 웃음마저 울음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만든다. 새삼 감탄하게 되는 이유다. 서현진이라는 배우의 힘이다. 드라마의 정체다. 그녀를 본다.
http://www.stardail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94627
'드라마'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스터, 국수의 신-보상받아야 하는, 돌려받아야 하는, 두 개의 다른 과거 (0) | 2016.05.06 |
---|---|
마스터 국수의 신 - 국수에마저 처절해져야 하는 이유, 설득에 실패하다 (0) | 2016.05.05 |
또 오해영 - 오해와 우연, 만남과 인연, 운명이라는 필연을 위해 (0) | 2016.05.03 |
옥중화 - 죄의 한가운데서 자라난 꽃, 죄가 악이 아닌 이유 (0) | 2016.05.02 |
마스터 국수의 신 - 김길도의 악과 잔인한 4월의 자화상 (0) | 2016.04.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