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지라고 다가올 모든 시간을 한꺼번에 펼쳐놓고 보는 것이 아니다. 아마 신이 존재한다면 오로지 신만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연속된 시간으로서가 아닌 단락된 장면으로서 보게 되는 예지는 단지 가능성일 뿐이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이유와 원인과 과정들을 통해 그런 순간들과 마주하게 될 것인가. 숙제다. 퍼즐이다. 기대다. 막연하게 예지가 실현될 순간을 기다리며 기대를 부풀리게 된다. 드라마의 가장 중요한 재미 가운데 하나다.
어떻게 그냥오해영(서현진 분)은 잘 알지도 못하는 박도경(에릭 분)의 집에서 그와 함께 있는 것일까? 하필 직전 박도경을 유혹하는 듯한 대사까지 더해지며 야릇한 상상을 자극한다. 한바탕 집을 나가네 못나가네 다투고 난 뒤에는 오해영이 박도경 자신을 간절히 기다리는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역시 이번에도 파혼하기 전 정식으로 부부가 되어 함께 가기로 했던 유명레스토랑에 예약이 남아 있어 혼자 집을 나서고 있었다. 괜히 설레고 불안한 마음에 박도경 역시 하던 일도 중단하고 사무실을 나와 차를 달려 오해영이 기다리고 있을 집으로 달려갔다. 전혀 엉뚱하면서 개연성에 충실한 상황과 과정들이 한 편으로 당황하면서 한 편으로 납득하게 만든다. 한 마디로 웃게 된다. 결국 그런 내용이었구나. 예언은 어쨌거나 현실이 되었다.
그러고보면 예쁜오해영(전혜빈 분)도 예언 비슷한 것을 하기는 했다. 어쩐지 삶이 억울할 것만 같다. 그대로 되었다. 현실이 너무 억울하다. 결혼식 직전 남자로부터 파혼을 통보받았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자기와 이름이 같은 또다른 오해영 때문이었었다. 자기와 같은 이름에, 같은 학교, 같은 학년, 가은 반이었던 또다른 오해영이 박도경과의 결혼식 당일 일방적으로 나타나지 않은 것이 약혼자가 파산하고 자신과의 결혼마저 중단되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동정보다는 비난이 조금이라도 더 낫겠다고 파혼의 책임마저 떠안은 탓에 이제는 부모로부터도 외면당하고 집에서 쫓겨나는 비참한 처지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이 모든 일의 원흉이라 할 수 있는 남자가 바로 옆집에 살며 사사건건 자신의 삶에 끼어들려 한다면 이보다 더 난감할 수 없다. 결국 박도경이 자기에게 한 일들을 모두 알게 되었을 때 지금 오해영이 느낀 작은 감동은 어떻게 바뀔 것인가.
의외로 진전이 빠르다. 눈물은 독이다. 흘리지 못한 눈물은 안에서 썩어 자기를 해치는 독이 된다. 자기를 상처입혀왔었다. 생각날 때바다 자기를 베고 찌르고, 시간날 때마다 자기를 헤집고 후볐다. 차라리 그렇게라도 아프면 더 큰 아픔을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한계였다. 더 깊이 베고 찌르고, 더 크게 헤집고 후벼낸다. 그런데 더이상 견딜 수 없을 것 같을 때 누군가 위로의 말을 건넨다. 아무렇지 않은 것이 아니다. 큰 일이다. 너무나 아프고 힘든 감당할 수 없이 큰 일이다. 괴로워하는 것은 당연하다. 슬퍼하는 것도 당연하다. 울고 싶으면 울어도 좋다. 얼마든지 내키는대로 눈물을 흘려도 좋다. 그렇게까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들린다. 이 사람도 아팠으니 이 사람 앞에서는 눈물을 흘려도 좋을 것이다. 다른 어느 누구에게서도 이해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다. 세상에 단 한 사람 자기를 알고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다. 그로부터 위로받는다. 하필 그 사람이 자기를 도와주려 서툰 연기까지 보여준다.
그래서 불안하다. 두 사람 사이가 진전될수록 박도경이 감추고 있는 비밀은 절망적인 위력을 가지고 그들을 위협하게 될 것이다. 오해영이 알아서는 안된다. 아니 그 전에 박도경이 먼저 그 사실을 인지해야만 한다. 자기가 오해영의 결혼을 망쳤다. 자신의 오해로 오해영이 지금처럼 힘들고 괴로운 시간들을 견뎌야 했다. 자신의 잘못만 아니라면 오해영은 지금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와 함께 있었을 것이다. 벌써 누군가의 아내가 되어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겨우 찾은 오해영의 낙천이 먹구름을 만난다. 그런 모든 진실을 알게 된 뒤에조차 오해영은 결심처럼 모든 것을 걸고서 박도경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잔인한 장난이다. 하필 파혼한 약혼자 한태진과 정식으로 부부가 되어 함께 가기로 했던 고급레스토랑의 예약메시지가 핸드폰으로 날아온다. 같이 갈 사람조차 없다. 행복한 결혼을 꿈꾸며 장만했던 옷과 가방과 악세사리로 한껏 멋을 부리고 혼자서 레스토랑을 찾는다.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무덤덤하게 격한 감정을 잘 표현해낸다. 크게 표정을 바꾸지 않으면서도 오해영이 느끼는 절망과 상실감을 그대로 보여준다. 행복했어야 할 시간들의 잔해다. 함께 행복하기를 바랐던 순간들의 남은 찌꺼기다. 더이상 함께하는 이가 없다는 실감이 그녀를 더욱 절망케 한다. 진짜 혼자였다. 진짜 혼자가 되어 있었다.
잠시의 농담거리로 삼는다. 자신을 유혹하기 위한 서툰 거짓말의 소재로 써먹는다. 악의조차 없는 무심한 장난이었다. 있어야 할 곳이 아닌 곳에 이름이 오른 탓에 반장선거 내내 안절부절해야만 했었다. 혹시라도 아무도 자기의 이름을 적어내지 않는다면. 아니 자기가 자기의 이름을 써서 냈는데 그 한 표가 전부라서 모두가 알게 된다면. 그럼에도 끝끝내 자기라도 자기를 지지할 수 있기를 바라며 자기의 이름을 적은 것은 큰 용기였다.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는 이유다. 난데없이 추워지는 이유이기도 했다. 오래전 지금도 기억에 새로운 또다른 오해영으로 인해 겪어야 했던 감정들까지 떠오르고 있었다. 상처는 쉽게 아물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자기가 자기를 위로한다. 체념하지 않아도 되었다. 역시 이번에도 오해영은 운다. 가장 절실한 눈물이었다. 같은 편은 아닐지라도 같은 처지의 사람이 또 있었다. 어쩌면 위로였다.
예쁜오해영과 우연히 다시 만난다. 세상에는 해영이라는 이름도 많다. 성까지 오씨다. 하지만 차로 추월하며 보게 된 얼굴은 세월이 흘렀지만 분명 자신이 아는 예쁜오해영이 맞았다. 겨우 박도경과의 관계가 조금씩 진전을 보이려는 순간이다. 박도경을 결혼식 당일 바람맞힌 오해영이 다시 돌아와 또다른 오해영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남자의 옛여자와 여자의 옛남자, 그리고 남자와 여자, 악연은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구르기 시작한다. 역시 짓궂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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