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국경은 통신과 교통의 한계다. 명령을 전달해야 한다. 필요한 경우 물리력을 투사할 수 있어야 한다. 지방정부를 만들고 군대를 상시주둔하더라도 결국 그들에게도 중앙의 명령과 위력이 미쳐야만 한다. 대표적인 예가 로마제국의 군단장들과 당나라의 절도사 아니던가. 지배의 효율을 위한 지방의 군관구와 절도사가 도리어 중앙의 권위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 제국의 국경이 확장되어 온 이유이기도 했다. 아주 고대에는 도보로 이동했다. 국경이란 도보로 이동해서 닿을 수 있는 한계였다. 고대중국의 봉건제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상이 하를 멸망시킨 때도, 주가 상을 멸망시켰을 때도 그들의 무력은 제국의 변경 끝까지 미치지 못했었다. 아니 대부분의 제후국들 역시 영토 전체를 온전히 지배하지 못하고 있었다. 명령이 미치는 거점을 중심으로 한 점과 점의 연결이 고대제국의 정체였다. 그 점을 다스리는 것이 바로 제후였고 영주였다.
말을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더 빨리 더 멀리까지 보다 쉽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극단에 몽골제국이 존재했다. 생존을 위해서라도 대량의 말을 사육하고 어려서부터 말에 익숙해야 했던 유목민들은 말을 이용해서 일찍부터 광대한 제국을 건설하고 있었다. 최초의 유목민족인 스키타이부터 흉노, 돌궐, 그리고 몽골까지. 여러 마리의 말을 바꿔타며 아시아대륙의 끝에서 끝까지 이동하며 유례없는 대제국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결국 말이 이동할 수 있는 한계에 걸려 버렸다. 제국의 동쪽끝에서 서쪽끝까지 무력을 투사하기에는 몽골의 전성기에도 너무 많은 시간과 물자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몽골제국의 뒤를 이은 것은 대영제국이었다. 대영제국은 육지가 아닌 바다를 통해 확장해나간 제국이었다. 바다에는 경계가 없었다. 따라서 보다 크고 빠른 배를 보유한다면 절대속도는 느리더라도 상대속도는 더 빨리 필요한 곳에 필요한 인력과 물자를 투입할 수 있었다. 역시 한계는 시간과 한 번에 실어나를 수 있는 물량의 한계였다. 하지만 그조차도 투사할 수 있는 물량의 한계를 기술적 우위로 대신함으로써 대영제국은 바야흐로 바다를 통해 세계를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아마 미국의 독립도 프랑스의 노골적인 지원이 아니었다면 결국 영국의 압도적인 힘 앞에 실패하게 되지 않았을까.
미국의 지배방식은 영국의 그것과는 달랐다. 결국 특정한 지역을 정복하여 영토로 편입하려는 것은 그로부터 얻어지는 이익을 직접 독점적으로 누리기 위함인 것이다. 언제 바뀔지 모르는 타인의 주머니에 있는 것보다 내 주머니에 있는 쪽이 훨씬 활용하기에도 낫다. 그런데 굳이 정복해서 직접 지배하지 않더라도 필요한 것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간단히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필요한 것에 필요한 수단을 투사하여 자신의 의도대로 바꿀 수 있는 역량을 갖췄다면? 대영제국과도 다르다. 거의 보급이 필요없는 최첨단 함선과 시간을 압축할 수 있는 항공기들은 물리적 거리를 무시한다. 최대한 독립을 유지하면서 단지 필요한 수단만을 양보하거나 빌려준다. 이미 세계는 실시간으로 미국의 수중에 들어가 있다.
그러면 상상해보자. 먼 미래 인류가 우주로 나갔다. 우주를 개척해서 여러 곳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식민지 사이의 거리는 최소 광년 단위다. 한 번 이동하는데 빛의 속도로 몇 년이 걸린다.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른 수단이 발명되지 않는 이상 최소한 그보다는 더 오래 걸릴 것이다. 그래서 전쟁에 이기고 정복에 성공한다면 얼마나 지배를 이어갈 수 있을까? 빛의 속도보다 더 빨리 이동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무려 은하계의 지름만 10만광년이다. UFO가 외계인의 우주선일 가능성에 대해 부정적인 이유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진짜 외계의 문명이 보낸 인공물이라면 그 거리는 멀어봐야 수십광년 이내일 것이다. 그 이상 넘어가면 효율이 떨어진다. 아니면 아예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 손에 넣었거나.
물론 그럼에도 남은 가능성은 역사상 대부분의 제국들이 그같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를 넘어서려 시도하다가 무너지고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한계를 넘어선 비용을 지불해가며 국경을 넓히다 안에서부터 스스로의 모순으로 무너지고 만다. 그곳에 산이 있으니 올라간다. 그곳에 정복할 대상이 있으니 군대를 보내고 전쟁을 한다. 전쟁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다. 아마 가능하다면 거의 유일한 가능성일지 모르겠다. 단순히 영토에 대한 욕심으로 수십광년을 막대한 비용을 들여가며 이동해 정복지를 늘린다. 그때까지도 고작 그런 수준이라면 인류가 거기까지 갈 가능성도 매우 낮다고 할 수 있다.
경계가 없다. 국경선이 없다. 그나마 바다와는 달리 해안선마저 없다. 거의 무제한으로 전력을 투사할 수 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상대도 마찬가지다. 다른 누군가도 마찬가지다. 영국이 독일을 향해 폭격기를 띄우는 순간 독일은 영국을 향해 미사일을 발사하고 있었다. 영국을 향해 날아오는 미사일을 요격하는 것은 폭격기와는 다른 본토의 방어전력이다. 좁은 지구의 하늘에서도 폭격기와 미사일이 우연히 마주칠 확률은 매우 낮다. 인지하고 나서야 목표로 삼고 전투를 목적으로 전력을 투사하게 된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이 막막한 공간에서 우연히 마주치고 전투를 벌이게 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전투의 방식도 전혀 달라진다. 만일 전쟁이 벌어진다면 그것은 전쟁이 아니라 정복이다. 그래야 가능성이 있다.
인간은 과연 먼 우주로 나가서까지 지금까지처럼 전쟁으로 역사를 써나가게 될 것인가. 많은 SF작품들을 보면서 문득 머리에 떠오른 의문이었다. 인간이 여전히 인간이라면. 여전히 지금과 같이 사고하고 판단하고 행동한다면. 인간이 아니게 된 이후에 대해서는 모르겠다. 물론 그를 소재로 한 SF도 있다. 인간은 과연 우주에서 어떤 존재가 되어 있을 것인가? 유희다. 그냥 즐거움이다. 상상은 항상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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