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낀다고 다 좋은 것만은 아니다. 속된 말로 아끼다 뭣된다 하기도 한다. 더운 여름날 아이스크림이 너무 맛있어서 혀끝으로 조금씩 핥아만 먹는다. 얼음을 가득 넣은 냉커피를 빨대로 아주 조금씩만 맛만 볼 정도로 빨아먹기 시작한다. 얼음이 다 녹은 냉커피는 커피맛나는 얼음물이다. 그나마 들고 있는 아이스크림이 녹기 시작하면 그보다 곤란한 것도 없다.
하필 그토록 간절히 꿈꿔 왔던 두 사람의 결혼식을 올리던 날이었다. 너무 귀하고 아까워서 차마 하지 못했던 그 말을 오늘은 비로소 해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자신을 위한 상이었고, 자신과 함께 해주었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상이기도 했다. 그러나 바로 그날 사고가 일어나며 아내는 아무리 사랑한다 목청껏 외쳐도 듣지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도대체 들어줄 사람조차 없는데 사랑한다는 말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그나마 겨울이 지나서도 히터를 사는 이유는 다시 겨울이 찾아올 것을 알기 때문이다. 죽은 다음에는 무엇이 있는가.
벌써 한 사람을 잃었다. 아니 이미 그 전에 자신을 낳아준 친부모 역시 갑작스런 사고로 모두 떠나보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내고 혼자 남아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지금까지 홍지홍(김래원 분)이 먼저 떠나보낸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의 가족이었다. 낳아준 친부모이거나, 길러준 양아버지였다. 이성은 아직 경험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본질은 같다. 아버지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이미 멈춘 심장을 다시 뛰게 하기 위해 필사적이던 이유부터가 두려움이었다. 더이상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없다. 고맙다는 말도 할 수 없다. 그를 위해 아무런 보답도 할 수 없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 과연 이대로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도 못해주고 그녀를 떠나보낸다면 자신은 과연 견딜 수 있을 것인가.
내일은 없다. 오늘 하는 것이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하는 것이다. 소중하기 때문이다. 너무나 아깝고 그래서 아끼기 때문이다. 오늘이 지나면 다시 내일이 찾아오지 않을 지 모른다. 언젠가 반드시 사라지게 도리 필멸의 존재라면 그것은 당장 오늘 지금 여기서일 수 있다. 그래서 불안하다. 당장 유혜정과 마찬가지로 너무 아깝고 소중해서 그저 다음만을 기약하다가 영영 기회를 잃고 만 남자가 눈앞에 있었다. 홍지홍마저 남편의 말에 자극받아 영문모르는 유혜정을 잡아끌어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고 있었다. 사랑한다. 그렇다면 유혜정이 홍지홍에게 미뤄두었던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순간이 과연 언젠가 오기는 할까? 공중파드라마라는 점을 그래서 조금은 다행스럽게 여긴다.
어쩌면 자신이 의사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른다면 무모해지기라도 한다. 근거없는 확신과 낙관에도 반드시 나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과 자신감을 가져본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일이기에 쉽게 무책임해질 수도 없다. 반쯤은 의례적으로 말한다. 치료만 잘 받으면 반드시 나을 수 있다. 희망을 가지라. 어떤 때는 사실이고, 어떤 때는 환자가 낙담하지 않도록 그냥 하는 말이다. 자기에게 거짓말을 해봐야 금방 들킨다. 쉽지 않은 병이다. 최강수(김민석 분)가 자신의 핸드폰에 저장해서 보여준 CT사진을 보고 홍지홍 역시 바로 표정이 심각해진다. 바로 수술을 받아야만 한다. 이제 과연 자신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상황이 고약하게 꼬였다. 당장 주치의인 유혜정은 수술중이었다. 유혜정으로부터 대신 콜을 받아달라 부탁받은 진서우(이성경 분)는 세미나 때문에 자리를 비워야 했었다. 진서우로부터 부탁받은 레지던트 3년차 피영국(백성현 분)은 전날 당직이라 당장 휴식이 필요한 터였다. 하필 피영국으로부터 지시받은 최강우가 수막종으로 전화를 받던 당시의 기억을 잃고 말았다. 전화를 받고도 마침 발작으로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면서 상황은 급전직하 최악으로 치닫고 만다. 조기에 처치했으면 큰 문제 없이 끝났을 뇌출혈이 생사를 알 수 없는 응급수술이 되었다. 더구나 환자가 유력한 국회의원이다. 누군가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된다.
병원장 진명훈(엄효섭 분)이 유혜정이 자신의 뒤를 쫓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10년 전 자신이 집도한 수술에서 사망한 환자의 손녀인 유혜정이 당시의 진실을 알기 위해 여기저기 관계자들을 찾아다니며 사실들을 캐묻고 다니고 있었다. 뜻밖에 악역이라기에는 일처리가 무척 합리적이다. 자신의 뒤를 쫓는다고 바로 어떻게 위해를 가하려 하기 보다는 명분이 생겼을 때 정해진 절차에 따라 엄격하게 그녀를 응징하려 한다. 신경외과장 김태호(장현성 분)이 진명훈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면서도 굳이 그와 정면으로 맞서려 하지 않는 이유인지 모른다. 최소한 일정한 선을 넘지는 않으며, 진명훈 역시 누구보다 병원을 아끼고 위하고 있었다.
유혜정의 위기다. 병원장 진명훈의 의도가 분명하고, 명분 역시 확실하다. 유력한 정치인이 자칫 병원의 실수로 목숨을 잃을 뻔했었다. 이유야 어찌되었던 유혜정 자신이 주치의였다. 실제 잘못하기도 했다.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 환자라 할지라도 고통이나 이상을 호소할 때는 혹시나 다른 병이 있는 것은 아닌가 주의깊게 듣고 확인했어야 했다. 거기서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미리 환자의 상태에 대해 대략적으로라도 알았다면 수술실에 들어가 전에 이미 한 차례 처치가 끝났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환자에 대해 부탁하고서도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하려는 노력마저 없었다. 방치되었다. 최강우의 수막종은 단지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홍지홍이 자신을 위해 나설 여지를 원천적으로 차단해 버린다. 홍지홍이 자신을 위해 병원장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서는 안된다. 홍지홍을 앞세워 병원장의 양보를 받아내는 것도 비겁했다. 유혜정이 어쩌면 병원에서 해고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그녀를 사랑한 남자 홍지홍은 그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봐야만 한다. 앞으로 전처럼 같은 병원에서 항상 함께 있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역시 지난회의 메시지가 이어진다. 마지막을 준비하는 각오다. 더이상 의사로서 같은 병원에서 함께 일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될 지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홍지홍은 인내할 수 있을 것인가.
싸움은 이제 시작이다. 병원에서 징계받고 해고되어도 아직 싸움은 끝난 것이 아니다. 진실이 남아 있다. 진실에 벌써 가까이 다가간 자신이 있다. 유혜정의 당당한 자신감은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기에 대한 확신이다. 겨우 여기까지 왔다. 10년이 남는 시간이 걸려 겨우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홍지홍은 그저 지켜보고만 있어도 좋다. 이제부터는 병원장과의 싸움이다. 병원장의 자신을 향한 악의를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기에 그 모습은 태연하면서도 상당히 긴장해 있었다. 유혜정과 진명훈이 비로소 마주서고 있었다.
확실히 정윤도(윤균상 분)는 쿨하다.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마저 객관화하는데 익숙하다. 내가 내 마음대로 유혜정을 사랑한다. 유혜정 역시 자기 마음대로 홍지홍을 선택하여 그와 사랑하고 있다. 질투한다. 괜히 유혜정의 마음에 빈틈을 노려보기도 한다. 애써 감추거나 치장하려는 노력 없이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홍지홍의 위로나 응원과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그러나 친구가 되기에는 너무 솔직하게 유혜정을 사랑하고 있었다. 같은 고민을 피영국도 하고 있다. 다만 이들의 문제는 피영국 자신이 자신의 감정을 객관화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있는대로 주위의 사정에 휘둘리며 파열음을 내기 시작한다.
환자의 주치의로서 어떤 식으로든 유혜정이 책임을 져야만 한다. 병원장 진명훈에게도 유혜정을 반드시 병원에서 내보내야만 하는 이유가 생겼다. 최강우에게서 심각한 병이 발견되었다. 아직까지는 혼자서 두려움과 불안에 떨고 있었다. 마지막에는 결국 의사로서 환자를 살려야 한다. 홍지홍은 유혜정을 위해 말없이 그를 지켜본다. 조용히 위기가 조여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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