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을 처벌할 수는 없다.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하다. 항상 모든 것을 잘 할 수는 없다.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얼마든지 실수든 잘못이든 저지를 수 있다. 성의를 가지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더라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경우라는 것도 현실에서는 적지 않다. 자신의 지식과 실력이 미치지 않았고, 혹은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런 때마다 일일이 책임을 묻고 처벌하려 한다면 세상에는 온통 죄인만이 가득할 것이다. 하긴 그래서 인간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일까.
물론 법적인 처벌이 아닌 도덕적인 응징이다. 행동의 동기를 묻는다. 과정을 따진다. 그리고 결과를 헤아린다. 그렇다면 과연 자신은 최선을 다했는가. 자신의 성의를 다했는가. 혹시라도 소홀한 점은 없었는가. 당연히 의도적으로 그같은 행동을 했었는가의 여부도 살펴봐야 한다. 그러므로 얼마나 성실하게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했는가. 그래서 결국 자신의 능력이 미치지 못했거나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면 사람으로서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의 힘으로 도저히 어쩌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까지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
바로 유혜정(박신혜 분)이 처음부터 할머니의 집도의 진명훈(엄효섭 분)에게 요구했던 것이었다. 어찌되었거나 수술도중 자신의 할머니가 죽었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자신이 집도하고 있는 도중 환자가 죽고 말았다. 진정 자신의 환자를 어떻게든 살리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다면 그 죽음에 대해 더 미안해해야 하고 더 안타까워 해야 하지 않을까. 설사 그런 것이 전혀 없었더라도 남은 환자의 가족을 위해서라도 일부러라도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어야 했다. 그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의사도 가족인 자신도 환자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단지 어쩔 수 없는 이유로 환자를 떠나보낸 것 뿐이었다.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었다는데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할 수 있는가. 그저 죽은 이를 조용히 떠나보낼 뿐이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한 마디 사과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죽은 이를 위해 진심으로 안타까워하고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었다. 마음에 여지를 남겼다. 어쩌면 살 수 있었을지 모른다. 죽지 않았을지 모른다. 죽은 사람을 온전히 떠나보내지 못했다. 미련과 망상 속에 죽은 사람을 끌어안은 채 일어나지 않은 가능성에 매달리도록 만들었다. 가장 큰 잘못이다. 유혜정으로 하여금 무려 13년이라는 세월을 할머니의 죽음 하나에만 매달리도록 만든 그것이 진명훈의 가장 큰 죄였다. 결국 그로 인해 의사까지 될 수 있었지만 그로부터 무려 13년 동안 유혜정은 죽은 이와 함께 자신의 것이 아닌 삶을 살아야 했었다. 그토록 독하게 복수를 다짐하고서도 정작 지금의 자신의 삶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던 것도 바로 그래서였다. 고작 친구였던 진서우(이성경 분)의 사과 한 마디에 유혜정은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과거의 원한이 현재의 행복보다 우선할 수는 없다. 자신의 현재와 미래마저 희생해가며 하는 복수란 자체가 전혀 의미가 없다. 누구를 위한 복수이고, 누구를 위한 응징인가. 그렇게 자신을 망쳐가면서까지 해야 하는 복수란 과연 죽은 사람을 위한 것인가. 진정 죽은 사람을 위한 것이라면 그렇게까지 해가며 복수해야만 하는 그런 사람이 자신의 삶이 망가지는 것을 진심으로 바랄 것인가. 자기만족이라면 복수가 끝냈을 때 자기는 어디에 있을 것인가. 그래서 이유를 찾는다. 사람은 현명하니까. 지혜로우니까. 어떻게든 용서해야 하는 이유를 찾는다. 더이상 미워하지도 원망하지도 말아야 하는 이유를 찾는다. 더 화가 나고 더 용서할 수 없는 것은 그런 이유조차 허락지 않는 것이다. 족쇄처럼 자신마저 해치는 원한에 얽매이고 만다.
어쩌면 가장 확실한 복수였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잘못으로 자신을 미워하고 경멸한다. 자신을 부끄러워한다. 자식이 자신을 부끄러워한다. 자신을 원망하며 외면한다. 아마 유혜저이 조금만 마음을 나쁘게 가졌더라면 진서우가 자신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을 때 그 사진을 찍어 진명훈에게 보냈을 것이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딸이 다른 사람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하긴 그 모습을 보고 부끄러움을 느낄 정도라면 일이 이 지경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도 그것을 따지려는 유혜정에게 더 분노하며 불쾌감을 느끼던 것이 바로 진명훈이라는 인간이었다. 딸을 그런 모습으로 만든 유혜정에게 모든 원망과 책임을 돌린다. 상황은 더 극단으로 치닫는다. 자신의 존재를 아예 무시하고 부정함에도 그저 유혜정이 자신에게 원한을 품지 않을 것이란 사실에만 웃음을 짓는다.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은 희생이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희생이 사람을 아름답게 만들지 못하는 것일까. 최고의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일방적인 이기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 자신으로 인해 사랑하는 홍지홍(김래원 분)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연구원이 되었고, 병원장의 비리를 밝힐 증거를 가지고도 망설이고 있었다. 자신으로 인해 홍지홍에게 피해를 입혔고, 병원에도 어쩌면 더 큰 피해를 입힐 지 모른다. 그래도 영영 홍지홍이 신경외과 의사로서 수술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병원의 비리를 밝히지 못해 계속해서 비리가 저질러진다면 과연 그 모든 책임에서 유혜정은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정작 유혜정은 그와 관련해서 무엇도 선택하거나 결정한 적이 없었다. 자신과 상관없이 자신의 책임까지 결정된다. 과연 그것은 유혜정을 위한 것인가.
존종이란 인정이다. 그리고 믿음이다. 하나의 독립된 인격이며 주체임을 인정한다. 그만큼 자신을 위한 최선의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다. 자신이 대신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만이 상대보다 더 상대를 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시다. 유혜정이 발끈한 이유다. 마치 아직도 선생님과 제자의 사이인 듯 일방적으로 가르치려 든다. 여전히 홍지홍과 유혜정은 한 사람의 남자와 여자로서 대등한 관계에 있지 않다. 자신이 유혜정보다 더 많이 알고, 더 깊이 생각하고, 더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유혜정은 그저 자기의 보호 아래 자신이 하자는대로만 따르면 된다. 아마 유혜정의 자존심이 조금만 더 셌거나 홍지홍을 향한 감정이 조금만 더 약했다면 어쩌면 두 사람 사이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을지 모른다. 결국 홍지홍의 일방적인 결정이 남긴 것은 홍지홍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유혜정 자신에 대한 모멸감과 환멸 뿐이었다. 의도하지 않게 자신을 죄인으로 만든다.
하긴 누구나 알면서 항상 실수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무의식적으로 자기 아닌 타인에 대해 무시하게 된다. 의도해서가 아니라 그냥 무심히 상대의 존재를 지우게 된다. 딸을 사랑한다면서 딸의 생각을 묻기보다 딸에게 자신의 일방적인 사랑만을 강요하려는 진서우의 부모 진명훈 부부의 모습이야 말로 그 대표적인 예다. 동생이 자신을 위해 군대에서 PX도 가지 않고 한푼두푼 모은 통장을 내놓는다. 형이 그런 자신을 꾸짖으며 통장의 돈을 자신을 위해 쓰라 한다. 다만 차이는 그럼에도 두 형제는 상대의 선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형의 거절은 거절이 아니고, 동생의 타박도 타박이 아니다. 성대의 선의를 무시했을 때 오해가 생겨나고 갈등은 빚어진다. 모든 것은 거기서 출발한다. 진서우가 유혜정의 사정을 듣고 아버지를 찾아가 따져물으며 했던 말이다. 어째서 사람들에 대해 그렇게만 생각하고 대하는가고.
유혜정의 성장이 이번에는 홍지홍을 이끈다. 어쩔 줄 몰라하는 어린아이 같다. 혼자서 모든 판단을 내리려 하는데 정작 그 판단에 대한 확신이 없다. 아버지가 세우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병원을 위한 정의인가. 그렇지 않으면 사랑하는 사람 유혜정의 안위인가. 어느쪽을 선택해도 후회한다. 어느쪽을 선택하더라도 자신을 원망하게 된다. 답은 당사자인 유혜정이 가지고 있다. 설사 진명훈이 어떤 식으로 보복하더라도 모두 자신이 감당할 자신이 있다. 그래도 정 힘들다면 그때는 홍지홍이 손을 내밀어주면 된다. 자신감이다. 유혜정의 자신감이 홍지홍에게 확신을 불어넣는다. 강해지고 당당해진다. 두 사람은 대등해진다.
참 좋은 사람이다. 마지막까지 정윤도(윤균상 분)는 좋은 사람으로 남는다. 자신이 좋아하는 유혜정이 자기 아닌 다른 사람과 다정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질투나고 화도 나지만, 그렇다고 정작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인 유혜정에게 어떤 위해를 끼칠 생각따위 없다. 철저히 자기를 위한 사랑이다. 오로지 유혜정을 사랑하는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하며 집중한다. 그런 한결같은 올곧음은 진서우에 대해서도 어김없이 발휘된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일로 의기소침한 진서우를 내버려두지 못하고 끝까지 곁에서 지켜주려 한다. 자신이 말한대로 이성이 아닌 지켜주어야 할 동생으로서다. 그래도 결국 라이벌 역할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마지막회를 맞는 모습이 조금은 안타깝게 여겨지기도 한다.
악인까지는 아니었다. 그래서 약점을 찾아내기도 쉬웠다. 치밀하지도 악랄하지도 못했다. 홍지홍을 위협한 수단이라 해봐야 진짜 악당들에 비하면 코웃음 나올 정도였다. 그래서 종양에 걸린 것인지도 모른다. 앞서도 말한 용서하기 위한 이유였다. 더이상 미워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였다. 상당히 치명적이고 위험한 종양 소식에 딸 진서우도 원망하던 아버지를 용서하고 만다. 아버지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만다. 아들을 살리기 위해 아버지 진성종(전국환 분)은 홍지홍에게 먼저 손을 내민다. 의사와 환자로서다. 의사로서 환자를 살려야 하고, 환자는 살기 위해 의사에 기대야 한다. 이보다 더 극적인 장치가 있을까?
홍지홍이 마침내 유혜정에게 청혼한다. 비로소 유혜정 역시 홍지홍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한 사람의 의사로, 인간으로 성장한 것이었다. 홍지홍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기에는 아직 남은 과정들이 있다. 진명훈의 종양을 수술해야 하고, 아버지와의 틀어진 관계를 정리해야 한다. 진서우와의 관계 역시 단지 오래전 학창시절의 추억만은 아닐지 모른다. 그 순간에마저 홍지홍은 유혜정을 일방적으로 판단한다. 앞날이 순탄치는 않다. 거의 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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