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내일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을 견딜 수 있는 것도 내일에 대한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혹은 5분 뒤, 10분 뒤, 1시간 뒤, 한 달 뒤, 1년 뒤, 10년 뒤에... 하루하루의 계획을 세우는 것은 따라서 하루하루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가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죽어서는 안된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내일은 오늘에 대한 보상이다. 오늘을 견디며 살았던 것에 대한 대가다. 어떤 내일을 맞을까? 내일은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어디에 있고, 누구와 만나며, 무엇을 하게 될까? 물론 항상 좋은 일만 있지는 않다. 그래서 안좋은 일이 있으면 누구나 지금 당장 시간이 멈추었으면 바라게 된다. 시간이 멈출 수 없다면 자신이 멈춘다. 반대로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으면 조금이라도 빨리 내일이 왔으면 바라게 된다. 내일을 기다리며 서레어 한다. 시간이 멈춘다는 것은 재앙이다. 감히 자신이 없는 내일을 생각할 수조차 없다.
그런데 그런 꿈조차 꿀 수 없다면? 김사욱(지수 분)과 헤어지고 돌아서는 백설(박시연 분)의 미묘한 표정변화에 눈이 가는 이유다.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은 꿈이다.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은 꿈이었다. 꾸어서는 안되는 꿈을 꾸게 되었다. 아무런 희망조차 없는 꿈을 절망처럼 간직하고 살아야 한다. 더이상 꿈꿀 수 없는데 꿈꾸라 한다. 더이상 살 수 없는데 살아가라 한다. 겨우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겼는데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며칠을 더 살 수 있을 지 모른데 너무나 간절히 내일을 살고 싶다. 안 될 것을 안다. 그래서 더 절망스럽고 고통스럽다.
사랑해서는 안된다. 어차피 사랑할 수도 없다. 그런데 운명은 짓궂게도 미처 대비할 사이도 없이 그것을 자신의 앞에 휙 던져놓고 만다. 어찌해야 할까? 그럼에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은 사람은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단지 요양원에 있는 엄마 걱정에 고단한 하루하루의 일상을 견뎌오고 있었다. 그것은 희망이 아니었다. 단지 미련이었다. 그저 살기 위해 억지로 부여잡고 있을 뿐이었다. 엄마가 지금보다 나아질 수 있을 것이란 기대도, 엄마와 함께하는 내일에 대한 계획도 없이 그저 그것을 오늘을 견디는 이유로 삼으려 하는 것 뿐이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거리로 나선다. 오랜 친구들을 만난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까? 차라리 아예 몰랐으면 모를까 한 번 알아버린 이상 돌이킬 수 없다.
그래서 지금 사랑해서 어쩌려는 것일까? 지금 자신이 류해성(주상욱 분)을 사랑해서 장차 무엇을 어쩌겠다는 것일까? 죽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죽어가는 자신을 보는 모습을 봐야만 한다. 희망이란 없다. 기대란 없다. 온통 절망 뿐인데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도대체 자신에게 무슨 의미이겠는가. 단 하루를 더 살 수 있다 했을 때 하루 만큼의 기대가 생겼다. 고작 1년이라도 더 살 수 있다 했을 때 1년 만큼의 기대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만큼 더 못산다 했을 때는 겨우 가졌던 기대들을 절망으로 바꾸어 놓는다. 차라리 몰랐다면. 사랑하는 줄도 모르고 지냈었다면. 다시 류해성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럼에도 사랑하고 싶다. 그럼에도 살아가고 싶다. 단 하루라도, 다만 1분 1초라도 행복하게 살아 있고 싶다. 본능이다. 그 본능에 류해성이 불을 지핀다. 포기하려는데 다가와 살게 한다. 살고 싶게끔 한다. 그래서 포기했다. 어차피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멀리했다. 어차피 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루를 살아야 한다면 자신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처음 이소혜(김현주 분)가 자신의 암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던졌던 물음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만일 사람이 자신이 죽을 날을 알게 된다면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더이상 살 수 없을 것을 알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김현주의 연기는 그런 점에서 참으로 담담하다. 그래서 더 먹먹하다. 차마 소리내어 울지 못하는 슬픔을 연기한다. 차마 마음놓고 괴로워하지도 못하는 절망을 아무렇지 않게 연기한다. 희망이 있어 웃는 것이 아니다. 살아갈 수 있어서 오늘을 사는 것이 아니다.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아무 이유도 찾지 못했다. 그러나 살아간다. 살라가려 한다. 그 무덤덤한 발버둥이 드라마를 더욱 밝게 어둡게 색색으로 치장한다. 과장과 절제를 넘나들며 가볍고 무거운 연기를 동시에 모여주는 주상욱의 존재는 드라마를 단단히 지탱하는 기둥과도 같다. 삶이란 때로 희극이고 때로 비극이다. 이소혜에게 류해성이란 어쩌면 삶 그 자체인지 모른다.
돌고돌아 이소혜와 백설의 인연이 백설의 시누이 최진숙(김정난 분)과 이어지고 만다. 최진숙은 류해성이 소속된 기획사 대표다. 지금 이소혜가 대본을 쓰고 있는 드라마의 제작자다. 백설과 최진숙의 악연처럼 이소혜와 최진숙도 악연으로 엮여 있다. 하긴 악역은 하나면 족하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삶은 버겁고 피곤하다. 고단한 일상 그 자체와 같은 존재들이다. 되는 것도 없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부당하고 불공평한 세상에 한 마디 원망도 던져본다.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그런 기대조차 가질 수 없는 절망에 대해서.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는 인간에 대해서. 어떤 절망 속에서도 오늘을 살고 내일을 맞는다.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내일을 꿈꾸며 오늘을 살려 한다. 꿈꿔서는 안되는데 꿈을 꾼다. 꾸어서는 안되는 꿈을 꾸려 한다. 어떻게도 인간은 내일을 살 수밖에 없는 존재다. 희망을 말한다. 인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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