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조국가에서 장자승계란 왕조의 완전한 사유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재산을 상속하듯 단지 왕의 혈통만으로 왕위를 물려주는 것이다. 다른 조건은 필요없다. 오로지 왕의 혈통만이, 그것도 적장자라는 정통성만이 유일한 자격이 된다. 물론 그 자격을 담보하는 것은 오로지 아버지인 부왕 뿐이다.
장자승계가 정착하기까지 그래서 많은 왕조에서 끊임없이 갈등과 대립이 일어나고 있었다. 뜻밖에 중국드라마 '보보경심'에서도 옹정제의 3황자 홍시의 입을 빌어 그 부분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천하는 과연 모두의 것인가? 아니면 황제 개인의 것인가? 당연히 황제의 입장에서 천하는 황제 개인의 것이어야 한다. 황제 자신 말고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절대의 권리다.
강희제가 일찌감치 자신의 둘째아들이자 황후에게서 태어난 적장자인 윤잉을 황태자로 세우고 직접 가르치려 했던 이유였다. 황태자란 말 그대로 다음대 황위를 물려받을 것이 예정된 존귀한 신분이다. 황제가 되기 전부터 벌써 황제 다음 가는 예우와 더불어 다음 황제로서 충분한 자격을 갖출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이 집중된다. 물론 그것을 가능케하는 것은 황태자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후견인이기도 한 아버지 황제의 존재일 것이다. 다른 측근이나 파벌의 도움 없이 오로지 아버지인 황제에 의해 자연스럽게 황제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수 있게 된다. 황제가 사유한 권력은 그렇게 황태자에게로 물려지게 된다.
그런데 아니었다. 중국에서도 장자승계가 자리잡기까지 많은 혼란이 있었다. 원래 장자승계는 만주족의 풍습도 아니었다. 2대 숭덕제 홍타이치부터 3대 순치제에 이르기까지 무려 두 명의 황제가 선황의 유조도 아닌 대신과 일족의 회의로 결정되고 있었다. 강희제가 일찌감치 선황 순치제에 의해 황태자로 지목되었다고는 하지만 그조차 공식적인 것이 아니었고 그 과정에서 태후와 황후의 영향도 작지 않았었다. 강희제 한 사람의 노력으로 바뀌기에는 만주족의 전통은 너무 뿌리깊었었다. 어느새 황태자인 윤잉에게도, 황태자와 맞설 수 있는 뛰어난 인재인 8황자 윤사의 주위에도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특히 8황자 윤사의 주위에 모인 대신들은 이전과 같이 만주족의 전통대로 가장 뛰어난 황자를 황제에 세워야 한다 주장하고 있었다. 이는 분명 강희제의 의도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황태자 윤잉부터 지나치게 길었던 황태자 생활과 강력한 경쟁자의 출현으로 조급해하며 틈을 보이고 말았다. 정신이 무너지기라도 한 듯 비행을 일삼고, 마침내는 측근들과 손잡고 제위를 찬탈할 모의까지 꾸미고 있었다. 그저 아버지 강희제만 믿고 가만히 기다렸으면 언젠가 아버지가 죽으면 자연스럽게 자신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테지만 어쩌면 그러지 못할 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로 하여금 무리한 행동을 하도록 만든 것이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황태자를 가장 적극적으로 공격한 것도 8황자 윤사를 지지하는 대신들이었다. 강희제가 보기에 이것은 명백한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감히 자신이 세운 황태자를 반대하여 다른 황자를 앞세워 황태자를 폐위시킨다.
원래 강희제가 아니더라도 전제적인 군주들은 신하들이 서로 파당을 이루어 다투는 것을 무척 싫어했었다. 한나라 때는 단지 조정에서 당을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기도 했었다. 왕의 신하는 오로지 왕만을 따라야 한다. 왕에게 속하여 왕에게만 충성을 바쳐야 한다. 그런데 파당을 만들면 왕 말가도 각 파당의 우두머리에 속하여 그 지시와 명령에 따라야만 한다. 때로 왕의 명령보다 파당의 명령을 더 우선할 수도 있었다. 실제 황태자의 폐위 이후 강희제가 붕어하기까지 무려 19년동안 황자들끼리 서로 파당을 나누어 황위를 경쟁한 결과 황제의 권위는 떨어졌고 국기는 문란하여 옹정제가 즉위했을 때는 국고마저 고갈된 상태였었다. 그렇다면 강희제가 보기에 이 모든 사단의 원인은 누구에게 있었을까?
드라마에서 묘사한대로 4황자 윤진이 마침내 강희제의 유조를 받아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강희제 생전에 음흉할 정도로 황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척 자신을 낮추고 꾸민 덕분이었다. 원래 8황자 윤사를 지지하던 융과다마저 강희제가 붕어할 당시까지 아무도 몰랐을 정도로 은밀하게 끌어들여 자신의 세력으로 삼았을 정도였으니 그 교묘함과 치밀함이 과연 옹정제라 할 정도였다. 대신들도 황자들도 오로지 황제 한 사람만 보아야지 사사로이 세력을 만들고 파당을 나누어서는 안된다. 결국 옹정제는 비밀유조를 남기는 방식으로 강희제의 실패를 보완한다. 가장 뛰어난 황자에게 황위를 물려주되 그 결정은 오로지 황제 개인에 의해 이루어지며 아무도 모르게 은밀하게 감춰져 있다. 유조의 내용이 밝혀지기까지 모든 황자와 대신들은 그저 황제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강희제에게서 황위를 물려받은 만큼 황제에 오른 옹정제의 정치적 목표 또한 다를 수 없었다. 사실 이 단계에서 8황자 윤사가 알아서 죽을 짓을 저지르기도 했었는데, 감히 강희제 생전에 그랬던 것처럼 옹정제의 4황자 홍력에 밀리고 있던 3황자 홍시를 이용해서 제위계승에 관여하려 한 것이었다. 어떻게 해도 황권의 강화에 많은 황자들은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음을 스스로 입증해 보인 것이었다. 황제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 형제들은 적으면 적을 수록 좋다. 형제들을 모두 내치고, 마침내는 공신인 융과다와 연갱요까지 숙청하며 옹정제는 전에없는 절대적인 황권을 만들어내고 만다. 모든 대신은 감히 황제에게 충언하는 것조차 무엄한 황제를 보조하는 존재에 머물고 말았다. 다만 그런 식으로 아예 황제에 대한 비판조차 금지한 탓에 잘못을 바로잡지도 못하고 그대로 쇠퇴하여 멸망에 이르고 마는 원인이 되었지만 말이다.
그냥 8황자의 모친의 신분이 비천해서, 혹은 8황자의 야심이 너무 커서 감정적으로 그를 미워한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당장 8황자를 황태자로 책봉하고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더라도 당시 8황자에게는 빚을 진 대신들이 너무 많았었다. 형제들 가운데도 적지 않은 수가 그를 지지하며 따르고 있었다. 그들에게 모두 대가를 나누어주려면 황제의 자리로도 부족할 수 있었다. 하물며 아버지인 황제 자신에게 도전했다. 자신을 거스르고 자신이 오랫동안 고심해 온 황태자를 스스로 폐위하도록 만들었다. 아버지의 분노가 아닌 황제의 분노다. 아버지의 분노라면 차라리 풀렸겠지만 황제의 분노는 쉽게 풀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튼 드라마는 서사멜로의 공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하여튼 역사의 모든 사건들이 주인공 마이태 약희와 관련한 개인적인 감정들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의문으로 남아 있는 13황자 윤상의 유폐부터 그 발단이 마이태 약희 자신이었다. 옹정제가 그토록 8황자와 9황자 등을 미워하여 그들을 죽음에 이르도록 만드는 것도 역시 13황자의 유폐에 대한 원한인 동시에 마이태 약희에 대한 질투심이었다. 물론 실제의 역사적 사실은 그와 상당히 다르다. 하지만 마이태 약희가 주인공이니 그녀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그녀를 중심으로 한 좁은 세계에서 완결된다. 그래서 드라마는 마이태 약희의 주위를 넘어서 당시의 천하를 보여주지 않는다. 이것은 마이태 약희, 현대의 장효가 꾸는 아주 길고 오랜 꿈이다.
그야말로 마이태 약희에 의한 약희를 위한 약희의 드라마다. 배우 류시시에 의한 류시시를 위한 류시시의 드라마다. 원작의 팬들이 리메이크 드라마에 분노하는 이유다. 아이유에게는 류시시만큼 드라마를 중심에서 이끌어갈 힘이 부족하다. 때로 귀엽고, 때로 사랑스러우며, 때로 진지하고, 때로 위엄까지 느껴지는 천변만화의 표정들을 재현하기에는 연기력부터 모든 것이 부족하기만 하다. 다만 덕분에 약희만을 중심으로 역사드라마라기에는 지나치게 유치해진 것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 할 것이다.
가끔 앞뒤가 안맞는 것도 있고, 도대체 왜 저러는지 이해가 안가는 것도 있고, 무엇보다 내내 류시시의 이마에 난 뾰루지들이 눈에 거슬렸다. HD시대라 배우들이 신경써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 청대의 시대를 묘사하는 소품과 배경들은 무협마니아인 자신을 행복하게 해준다. 뒤늦게 정신없이 달려 봤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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