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다른 무엇도 아니었다. 어느 누구도 아니었다. 바로 자신이었다. 기대는 데 익숙하지 않다. 배려받고 보호받는 것이 어색하기만 하다. 당장이라도 기대고 싶다. 안겨서 엉엉 울며 응석부리고 싶다. 하지만 정작 그러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어떻게 하면 좋은지 전혀 알지 못한다. 낯선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같은 것이다. 그저 본능처럼 무작정 뿌리치기부터 한다.
류해성(주상욱 분)은 이미 자기가 할 수 있는 그 이상을 해 보이고 있었다. 한 번 그녀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사랑한다. 전혀 아무 내색없이 오로지 그녀를 사랑하려 한다. 류해성의 머리속에 이소혜(김현주 분)의 암이란 자신이 이소혜를 위해 배려해야 하는 여러가지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손을 내밀면 기꺼이 잡아준다. 어깨를 빌려달라면 기꺼이 내준다. 엉엉 울어도 오히려 울어준 것이 감사하다. 그래서 더 문제다. 류해성의 진심을 느끼면 느낄수록 그에게 기대고만 싶은 자신이 한없이 작고 초라하게 여겨진다.
판도라의 상자에서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것이 '희망'이었듯 혼자서 세상과 부딪히며 살아온 이들에게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 없는 한 가지는 바로 자존심일 터였다. 어떤 어려움에도 쉽게 꺾이거나 굽히지 않는 강하고 당당한 자기 자신일 것이었다. 한 번 약해지기 시작하면 겉잡을 수 없이 무너진다. 한 번 물러서기 시작하면 다시 일어나지 못할 지 모른다. 자기의 뒤에, 혹은 옆에 누군가 있을 것이라 감히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누군가 자기를 지탱해주고 일으켜줄 것이라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작은 온기에도 화들짝 놀란다. 문득 보이는 사람의 그림자에 지레 놀라 움츠러들고 만다. 그들이 사는 세계는 자신만이 존재하는 외롭고 사막한 공간이다. 그런데 누군가 자꾸 그 공간의 문을 두드린다. 문을 여는 것이 너무 두렵기만 하다.
이소혜가 애써 류해성에게 반발하는 모습을 보이는 이유였다. 흔들릴수록 더 거세게 반항한다. 약해질수록 더 억세게 저항한다. 자신마저 속인다. 이러는 것이 옳다. 이렇게 하는 것이 모두를 위해서 좋다. 모두를 위한 최선이다. 하지만 아무리 정교하게 꾸며도 거짓이 진실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주 사소한 계기로도 진실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고 만다. 원래 있어야 하는 곳이다. 솔직해져도 되는 핑계거리가 생긴다. 하필 최진숙(김정난 분)이 다시 찾아와 이소혜의 자존심을 건드린다. 이유가 필요했다. 아주 작더라도 솔직해져도 좋은 이유가 있었으면 바랐다. 뜻밖에 최진숙(김정난 분)이 이소혜와 류해성 두 사람을 위한 사랑의 메신저 역할을 톡톡히 해준다. 홧김에 솔직하게 류해성을 사랑해 보려 한다.
계기가 최진숙이었을 뿐 그것이 진심은 아니었다. 이유가 최진숙이었을 뿐 그것이 진실은 아니었다. 자신의 진심을 고백하는 순간 그곳에 최진숙은 더이상 없었다. 이소혜만이 있었다. 류해성만이 있었다. 아주 먼 길을 돌고돌아 마침내 이소혜는 류해성을 정면으로 마주본다. 류해성을 사랑하는 자신과도 정면으로 마주한다. 그를 사랑한다. 아무리 그에게 미안해도, 그런 자신이 비참하고 초라하게 여겨져도, 그래서 결국 언젠가 후회하게 되더라도,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자신은 오로지 한 사람 류해성만을 간절히 사랑하고 있다. 마지막 가는 순간까지 그와 함께하기를 바라고 있다. 이소혜의 구구절절한 고백을 역시 기대대로 류해성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런 이소혜를 자신은 누구보다 사랑하고 있다.
홍준기(김태훈 분)의 심술이었다. 질투였다. 차마 남은 시간도 얼마 되지 않는 이소혜를 질투할 수는 없다. 오로지 얼마 안되는 남은 시간동안 그녀가 행복해지기만을 바란다. 고작 자기가 느끼는 감정따위로 그녀의 남은 시간이 더렵혀지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래도 미운 것은 어쩔 수 없다. 홍준기가 바라는 것은 이소혜의 행복이지 류해성의 행복이 아니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 자기가 이소혜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무력감이다. 그 분풀이까지 모두 류해성에게 쏟아붓는다. 느닷없이 자기를 찾아와 형님이라 부르는 이 터무니없는 남자를 어떻게 해야 좋을 것인가. 오로지 이 사람만이 이소혜의 마지막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이 그를 더 슬프게 만든다. 화낼 수조차 없는 홍준기의 슬픔이다.
이미 한 번 친구 조미선(김재화 분)에게 사실을 털어놓고 기대어 울고 있었다. 타인의 온기를 알아 버렸다. 누군가에게 기대는 편리함을 알아 버렸다. 드라마는 결코 가쁘게 결과만을 보여주지 않는다. 하나씩 단계를 밟아 나간다. 하필 류해성이 이소혜가 부동산사기를 당한 것을 알고 단역배우를 고용해서 그녀에게 돈을 돌려주도록 했던 것도 어쩌면 그를 위한 장치였을 수 있다. 부동산사기가 조미선에게 자신의 병을 털어놓는 계기가 되었듯 류해성을 향해 폭발한 감정들이 이소혜의 진심을 일깨우고 있었다. 아주 아슬아슬한 선까지 그녀의 진심을 궁지로 내몬다. 이제 아주 살짝 건드리기만 하면 된다.
우연히 전혀 뜻하지 않은 곳에서 그 사람의 이름을 들었다. 그를 향한 친창까지 들었다. 마치 자기가 칭찬을 들은 양 백설(박시연 분)의 입가에 웃음까지 머금어진다. 남편과 시집식구들에 대한 원망과 분노보다 그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앞선다. 사람은 역시 미움보다는 사랑으로 살아야 한다. 누군가를 미워하기보다 누군가를 사랑하며 살 때 더 행복하다. 행복은 모든 인간의 본능과 같다. 다만 앞으로 남은 과정에 적잖이 험난할 것이라는 점에서 조금은 걱정이 앞선다. 하지만 워낙 시집식구들 자체가 마치 하나의 풍자화처럼 우스꽝스러운 존재들이라 의외로 수월하게 풀릴 것을 기대하기도 한다. 어찌되었거나 행복해지면 희극이다. 웃으면 코미디다.
다른 무엇도 필요없다. 그저 사랑하는 자신이 있고 사랑하는 그가 있다. 그녀를 사랑하는 자신이 있고 그녀가 사랑하는 자신이 있다. 사랑이란 이기다. 그것도 아주 지독한 이기다. 사랑만 있으면 된다. 그 모든 것이 이 한 마디 말에 담긴다.
"사랑해!"
그리움과 미안함과 원망과 후회와 수치심, 그리고 나머지 모든 감정들이 이 짧은 한 마디에 녹아든다. 그래도 사랑하겠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랑하겠다. 나중에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지금은 사랑하겠다. 사랑만 하겠다. 가장 절절한 고백이다. 그래서 너무나 여상한 대답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간다. 사랑하며 살아간다. 그들은 사랑한다. 이 순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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