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후궁견환전 - 애와 욕, 정과 의...

까칠부 2016. 10. 10. 01:33

중국 무협소설을 보면 확실히 그런 부분들을 잘 묘사하고 있다. 다정이 무정이 되고 애정이 비정이 된다. 의가 악이 되고 협이 독이 된다. 세상에 정해진 것이 없으니 모든 것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해간다. 중국인의 사고 근저에 깔린 사상이다. 원래 태극이란 자체가 윤회이고 변화다.


차라리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처음부터 사랑따위 모르고 만났더라면. 그저 한 사람의 후궁으로써 황제를 모시게 되었더라면. 울분속에 눈을 뜨고 세상을 떠난 옹정제의 눈을 감겨주며 견환이 마지막에 읊조린 대사다. 그때 옹정제가 자기에게 과군왕이라 거짓말만 하지 않았더라면. 그러면 아마 많은 것들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황제도, 그리고 자신 역시.


그저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 평생 백년해로하기만을 바라던 소녀 견환이 후궁이 되어 궁궐로 들어가 황제의 총애를 다투는 후궁들의 질시와 모략의 한가운데에서 장차 황태후가 되기까지 성장해가는 이야기다. 처음에는 그저 황제만을 사랑했고, 그러나 조금씩 황제의 사랑만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마지막에는 황제의 사랑마저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자기 손으로 자신의 양자를 황제의 자리에 올리고 황태후까지 되었지만 과연 그것이 자기가 원한 삶이었는가.


온갖 기묘하고 악랄한 책략들이 동원된다. 자금성의 화려한 겉모습 뒤에 가려진 여인들의 눈물이 보인다. 황제의 총애를 잃으면 한겨울에도 탄조차 마음놓고 땔 수 없다. 당장 살기 위해 바느질을 해야 하고, 다른 후궁들의 모욕을 참아내지 않으면 안된다. 황제의 총애가 고작 답응에 불과한 여씨 앞에서 귀인인 심미장마저 한 발 물러서게 만든다. 심미장의 말처럼 후궁인 자신들의 삶은 온전히 자신들만의 것이 아니다. 첫째는 황제의 것이고, 둘째는 그들의 뒤에 있는 가문의 것이다. 항상 황제를 위해 단장해야 하고 오로지 황제만을 기다려야 하며, 자신들의 행동 하나가 가문의 성쇠와 흥망에 영향을 미친다. 죽음조차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다. 궁궐에서 만약 어느 후궁이 자살을 하게 되면 그 가문까지 모두 멸족당하게 된다.


달리 선택이 없었다. 달리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었다. 황궁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갈 수 없었다. 나름대로 꿈을 꾸며 사는 삶이란 용납될 수 없었다. 황제만을 바라봐야 하고 황제의 총애만을 바라며 살아야 한다. 그것이 그들의 존재를 결정했다. 그 안에서 그것이 그들의 서열까지 결정했다. 황제의 총애만 있으면 일개 비도 황후를 우습게 여길 수 있다. 황제의 총애만 있으면 가문까지 얼마든지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 있었다. 선택은 없는데 결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크다. 황제 한 사람의 총애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걸 수밖에 없다. 덕분에 마지막까지 황제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것은 어쩌면 황제에 의해 죽임을 당한 화비 연세란이 아니었을까. 부족한 것이 없었기에 황제의 총애마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해서 바라게 되었다.


드라마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역시나 공산주의 국가였던 때문인지 후궁이며 궁녀들이며 하나같이 자기욕망을 가진 주체적 존재들로 그려진다는 점일 것이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안위와 심지어 목숨까지 내던져가며 주인을 위해 충성하는 인물은 드라마에서 딱 세 명만 등장한다. 황제를 마지막까지 사랑했던 연비 연세란까지 포함하면 네 명이다. 황후의 궁녀 전추, 연비의 궁녀 송지, 견환의 궁녀 유주와 상궁 최근석. 진짜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하나같이 측근의 배신으로 인해 파멸을 맞는다. 그나마 황후와 연비는 측근인 환관들이 고문에 못이겨 모든 것을 털어놓은 탓에 몰락했지만 안릉용과 조근묵을 몰락케 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그들의 시녀들이었다. 심지어 황제를 어렸을 적부터 모셨다던 환관 소배성마저 최근석과 결혼한 뒤 아예 견환의 사람이 되어 옹정제를 배신하고 있었다. 황제는 황궁 안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소유라 생각하지만 정작 황제가 모르는 곳에서 그들은 자기만의 욕망을, 삶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공산주의적인 사고방식이 아닐까. 신분이 충성까지 강제하지는 않는다.


성장드라마답게 매번 새로운 인물들이 견환의 앞에 적으로 나타나며 그를 하나씩 극복해가는 과정도 흥미롭다. 처음은 견환을 대신해 황제의 총애를 받은 답응 여씨였고, 그 다음이 황제의 총애를 받아 황후마저 우습게 여기던 화비 연세란이었으며, 연세란마저 쓰러뜨린 다음에는 황후가 가장 위험하고 강한 마지막 적이 되었다. 연세란을 쓰러뜨리는 과정에서는 여빈과 조귀인이, 황후를 쓰러뜨리는 과정에서는 기빈과 안릉용이, 그리고 그 사이 경비와 단비와 부찰귀인이 그들의 아군으로 등장한다. 어렸을 적 자신을 짝사랑하던 온실초와 어려서 함께 자라 친자매와 같던 심미장이 가장 확실한 아군이다. 한 사람을 잃으면 한 사람을 얻고, 한 가지를 얻는 대신 또 한 가지를 잃는다. 사랑을 얻고 사랑을 잃고 그리고 그 사랑을 자기 손으로 죽인다. 그리고 얻은 대가가 천하를 발아래 둔 황태후다. 권력과 욕망의 무상함을 일깨우는 우화라고나 할까. 소녀 견환은 마침내 황태후까지 되었지만 그녀의 곁에 남은 것은 욕망을 상장히는 최근석 한 사람 뿐이었다.


조금 90년대 드라마를 보는 듯 연출이며 영상, 음악이 어색하고 유치하게까지 느껴지는 점이 있었다. 성우들로 후시녹음을 한 탓에 대사와 입모양이 맞지 않아 위화감이 느껴지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그런 단점들을 충분히 상쇄할만한 장점들이 있었다. 특히 배우들의 연기는 인상적이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가장 압권이었던 것이 화비 연세란이었다. 장흔이라는 이름도 몰랐던 이웃나라의 여배우에 한 눈에 반하고 말았다. 드라마의 시작부터 끝까지 조금씩 그 인상과 존재감을 더해가며 확실하게 중심을 잡고 끌어간 주인공 손려는 그녀가 어째서 중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배우로 자리매김했는가 보여준다. 그저 마르기만 했지 별볼일없다는 첫인상이 과연 후반에 이르면 한 나라의 태후에 어울리는 위엄마저 느끼게 한다. 이들이 출연한 다른 드라마를 찾고 있다. 배우 때문에라도 다시 보고픈 드라마였다.


그리고 또하나 이 드라마에 감탄한 한 가지는 주나라라는 허구의 시대와 공간을 배경으로 이루어지는 원작의 사건들을 실제의 역사인 청나라 옹정제 연간을 배경으로 바꾸며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은 깜빡 속아넘어갈 정도로 아주 훌륭하게 녹여냈다는 점일 것이다. 원래 돈숙황귀비 연씨가 죽는 것은 오빠 연갱요가 자살을 명령받기 한 해 전이었다. 연갱요가 총애를 잃은 연씨를 지탱해준 것이 아닌 연씨에 대한 총애가 오빠 여냉요의 명을 늘려준 것이었다. 한족의 피가 섞였다는 야사가 있는 건륭제의 출생과 관련해서도 뉴호록씨인 생모와 한족인 견환을 절묘하게 일치시킨다. 어쩌면 실제 당시 이런 일들이 있었을지 모른다. 최소한 4황자 홍력은 할아버지 강희제가 살아있을 때부터 차기 황제감으로 주목받고 있었을 터다. 역사따위 나몰라라 시대극인지 현대극인지 구분도 안가는 우리나라 역사드라마와 극명한 차이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덕분에 하필 요즘 보고 있는 조선배경의 드라마에 대한 평가가 엄격해지고 있다. 수준차기가 분명하다.


마지막회만 몇 번을 반복해 돌려보고 있다. 가끔 완결된 드라마를 볼 때 마지막회부터 보게 되는 경우가 있다. 마지막회를 보고서 보면 다시 처음부터 보기 시작했을 때 이해도 빨라진다. 인간은 욕망하는 동물이다. 그것이 권력이든, 사랑이든, 아니면 다른 무엇이든. 하지만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다.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도 없다. 무언가 더 소중한 것을 잃기도 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욕망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무협소설이나 역사책등을 통해 보던 청나라 궁궐의 일상들을 엿볼 수 있다는 점도 무협마니아인 나에게는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무엇보다 어설픈 무협이 그다지 나오지 않아 더 좋았다. 원작을 읽고 싶어졌다. 원작은 이보다 더 지독한 내용이라는데. 번역이 어렵다 말한다. 보고 싶다. 진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