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대부분의 로맨스에는 주인공들의 사랑을 방해하는 결정적인 장애물이 하나씩 등장한다. 그래서 로맨스다. 어렵고 힘든 과정들을 거쳐 서로의 진실한 사랑을 확인하고 마침내 이루어낸다. 그리고 그 가운데 역사라고 하는 거대한 운명에 맞서 자신들의 사랑을 지키고 이루어가는 장르가 바로 역사로맨스라는 것이다. 몇몇 개인의 힘만으로는 어떨 수 없는 역사의 격랑 속에서 그들은 사랑하고 또 사랑하며 마침내 자신들의 사랑을 지키고 이루어낸다.
중요한 것은 주인공들 모두가 자신들이 사는 시대의 피해자이며 한 편으로 시대를 극복하는 개척자들이라는 것이다. 설사 실패하더라도 상관없다. 그 안에서 얼마나 진실하게 사랑하고 그 사랑을 지켜갔는가가 중요하다. 어떤 가혹한 운명에도 굽히지 않는 인간의 의지이며, 어떤 고난과 위기에도 끝끝내 포기하지 않는 진실한 사랑의 위대함이다.
그래서 필자의 경우 처음 드라마가 시작되었을 때 여주인공 홍라온(김유정 분)이 세자 이영(박보검 분) 곁에서 권신 김헌(천호진 분)과 싸우는데 아무거라도 최소한의 역할은 하게 될 것이라 기대했었다. 당장 세자 자신이 왕마저 우습게 여기는 권신 일파와 맞서서 실추된 왕권을 바로세우고 피폐한 백성의 삶을 다시 일으켜야 하는 사명과 소망을 가지고 있는데 서로 운명적인 사랑을 하는 사이라면서 그저 옆에서 지켜보고만 있는 것은 맞지 않다. 더구나 일부러 여인의 몸으로 불가능한 내시까지 되어 동궁전 내관으로서 항상 세자의 곁에 머물고 있었다.
하긴 어차피 세자 자신도 정작 자신이 간절히 이루고자 하는 사명과 소망에 대해 이렇다 할 고민이나 노력을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누군가 자신에게 거짓서신을 보내 역적으로 몰려 했다는 확실한 정황을 확보하고서도 오히려 김헌을 비롯한 대신들 거의가 사직을 요청하자 거꾸로 궁지에 몰리는 장면이 그 대표적인 예다.
분명 확실한 계기만 있으면 왕과 세자인 자신에게 불손한 부패한 권신의 무리들을 하나씩 솎아내어 쫓아내거나 가능한 처벌할 계획이었을 게다. 그러면 과연 김헌 일파를 내쫓은 자리를 어떤 이드로 채울 것인가. 그래서 세도정치에 대해 정조의 책임도 적지 않다 말하는 것이다. 조정에서 서로 견제하며 대립하던 여러 당파를 국왕을 중심으로 줄선 하나의 세력으로 만들고 말았다. 왕권을 떠받치라 고른 친위세력이 오히려 왕은 나몰라하며 자기 욕심만 채우면 그때는 무엇으로 그들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인가.
현실적인 고민이나 대안이 없다. 자기 사람이 있어야 한다. 권신 김헌의 눈치를 보지 않는 오로지 자기 사람과 세력이 있어야 한다. 당장 김헌 일파가 그만두려 하면 그들로 그 자리를 채워넣어야 한다. 김헌 일파가 끝까지 버티려 해도 그들을 동원해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게끔 압박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그런 자기 세력을 만들 수 있을까?
김헌만 쫓아낸다고 끝이 아니다. 아무리 약점을 잡았어도 명분만으로 김헌 일파를 어떻게 하기에는 이미 저들의 힘에 지금의 왕마저 굴복한 뒤였다. 그런 과정들을 그려야 했을 터였다. 재야나 조정과 궁궐의 한미한 구석에서 인재를 발굴하고, 혹은 그 인재들로 세력을 만들고, 그리고 권신 김헌 일파를 제거한 이후를 대비해야 한다. 하다못해 아버지가 자기 세력을 만들라고 권한 명문 풍양 조씨와의 결혼마저 별다른 이유 없이 거절하고 있었다. 이유는 다른 것 없다. 사랑만 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드라마의 장점이자 가장 큰 한계다. 오로지 사랑만 한다. 오로지 사랑만 하며 살아가려 한다. 때로 세자 이영이 극복해야 하는 시대의 현실마저 사랑에 가려져 버린다. 그래서 어렵지 않다. 복잡하지 않다. 그저 서로 사랑하는 이영과 홍라온의 뒤만 따라가면 된다. 자신들을 얽매고 강제로 떠미는 시대에 대한 묘사는 그들이 맞서야 할 적 김헌과 권신들을 악마화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이들이 이렇게 나쁘다. 이들이 이렇게 못됐다.
안타깝기는 한데 그렇다고 그들과 싸우기 위해 무언가를 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그대로 내버려 둔 채 자신들은 사랑만 한다. 정작 자신들을 둘러싼 시대와 운명과 맞서싸우지 않으니 홍라온이 해야 할 역할이 사라진다. 세자야 어차피 처음부터 김헌 일파와 맞서고 있었지만 홍라온에게는 굳이 그래야만 하는 이유도 동기도 없었다. 그나마 홍경래의 숨겨진 딸이라는 것이 전부인데 그마저 지금은 관군에 쫓기는 처지이지 조정의 대신들과 맞설만한 상황이 아니다. 한 마디로 심심하다. 지루할 정도로 반복되는 세자와 홍라온의 사랑놀음만 지켜봐야 한다. 그나마 박보검과 김유정의 연기력과 매력이 그 와중에도 보는 즐거움을 느끼게 한다.
차라리 방관자에 가깝다. 각자 자기만의 이유와 목적을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가운데 오로지 홍라온만이 한가롭다. 하다못해 중전(한수연 분)마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배아파 낳은 자기 딸을 버리라 명령하는 비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가문과 우정과 사랑, 무엇보다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신념과 가치를 위해 김윤성(진영 분) 역시 할아버지 김헌과 맞서려 하고 있었다. 권신 김헌은 김헌대로, 그를 따르는 대신들은 또 그들대로, 왕 역시 마찬가지다. 상선(장광 분)을 비롯한 백운회 역시 자신들이 추구하는 이상과 목표가 있었다. 그러나 그런 분주한 움직임 가운데 과연 홍라온은 자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사랑을 지키기 위해 운명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홍라온은 세자 이영마저 저버린다.
그냥 예쁜 소녀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저 사랑받는 예쁘장한 소녀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 세자는 가끔 진짜 세자가 되기도 한다. 홍라온을 미끼로 건넨 편지를 오히려 역이용하여 김헌 일파를 옭아매는 장면은 저도 모르게 감탄이 터져나왔다. 그 다음 대처가 한심하기는 하지만 그래봐야 어차피 아버지인 왕마저 어찌하지 못하던 권신들인 것이다. 머리 몇 번 썼다고 이미 오래전부터 조정을 장악해 온 그들이 한순간에 흩어질 리 없다. 그래도 세자로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면서도 홍라온에 대한 사랑도 지키려 분명 나름대로 필사적이었다. 다만 결국 세자보다 소년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는 것이 아쉬운 점이다. 그로 인해 세자가 중심이 되어야 할 서사가 줄어들며 홍라온의 역할까지 위축된다.
오히려 아예 세자가 아닌 소년에 더 집중했다면 홍라온에게도 기회가 생기지 않았을까. 단지 소년과 소녀가 가혹한 시대를 살아가는 이야기라면 살아있다는 자체만으로 드라마가 될 수 있을 터였다. 모든 것이 위험이고 고난이다. 그렇게까지는 아직 몰리지 않았다. 왕과 백운회, 권신 김헌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이어가던 그들의 사랑마저 그래서 그렇게 절실하지 않다. 어쩔 수 없다기에는 미련이 남지 않을 정도로 충실하게 이별의 과정을 모두 밟고 있었다. 결국 모든 것은 자신의 선택이었다. 너무 길었다. 아쉬움을 남겨야 했다.
아무튼 로맨스를 크게 즐기지 않는 입장에서는 지나치게 늘어지는 사랑이야기가 지겹기도 하다. 별 일 없이 반복되는 거의 같은 장면들에 지루함도 느낀다. 무언가 주인공들을 드러낼 수 있는 사건이 필요하다. 이만큼 그들의 사랑이 진실하고 간절하다 느낄 수 있는 계기가 필요하다. 어이없이 홍경래가 살아있었고 관군에 체포되고 있었다. 왕이 기절하고 혼례중에 세자가 그 소식을 듣는다. 그런데 역시 아버지가 잡혀갔다고 이제와서 홍라온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없다. 세자와 사랑하는 것. 어떻게 홍라온의 사랑이 세자를 구하고 아버지를 구할 것인가. 홍라온이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조차 이제는 전혀 없다. 그런데도 어떻게 시대라는 격랑은 그들의 사랑을 그들의 운명으로 데려갈 것인가. 유일한 질문이다.
가상이든 어쨌든 역사시대가 배경이 아니었으면 더 나았을지 몰랐다. 주인공이 세자가 아니었다면 더 좋았을 뻔했다. 주인공 세자만 남는다. 홍라온은 그저 소녀가 된다. 무력하게 보호받는 대상이 된다. 인질이 되고 미끼가 된다. 구속이 되고 족쇄가 된다. 정작 이야기의 중심에 있지 못하다. 단지 예쁜 사랑이 좋다면 이보다 좋을 수 없다. 하필 진짜 매력적인 배우들이다. 스타의 매력이 드라마를 끌어간다. 그들 때문에 본다. 이제와 남은 마지막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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