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드라마라기보다 마치 한 편의 무협드라마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하긴 무협드라마라고 본다면 상당히 전형적인 설정이기는 하다. 어떤 계기로 인해 급전직하 추락하게 된 주인공이 인적도 드문 오지에서 은거한 고수를 만나 절기를 배우고 세상에 나온다. 위독한 응급환자를 치료하는 김사부(한석규 분)의 손놀림을 보고 감탄하는 강동주(유연석 분)의 모습부터 딱 그것이었다. 사람을 치료하는 의술이 마치 무협소설에 나오는 무공초식처럼 묘사되고 있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드라마는 철저히 한국드라마치고 서사보다 묘사에 더 집중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더 정확히 비상수단으로 응급환자를 치료하는 액션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으로까지 여겨졌다. 퍼포먼스였다. 얼마나 위급한 상황에서 얼마나 놀라운 방법들을 사용해서 마침내 환자를 치료하는가. 나머지는 그를 위한 장식에 지나지 않았다. 컴퓨터게임을 할 때 게임을 시작하기 전이나 끝내고 난 뒤 게임의 배경이나 이후의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게 여겨도 좋을 만큼 제작진이, 아니 배우들이 혼신의 연기로 보여주는 응급치료의 현장이란 압도적인 박력 그 자체였다. 긴박감에 숨쉬는 것도 잊는다.
5년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그 사이에도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누군가 5년 동안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다면 지난 이야기들로만 몇 날 밤을 새어도 모자른다. 그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서로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 정작 자기 자신은 돌아보지 못한다. 끊임없이 변명하고 합리화하는 사이 어느새 그런 자신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 버린다. 몇 년 전 자신을 만나기 전까지는. 5년 전 자신을 기억하는 누군가를 만나기 전에는. 그녀가 기억하는 자신과 마주하기 전에는. 강동주가 돌담병원으로 가야만 했던 이유였다. 헤어져 있던 시간 만큼 다시 만난 그녀에게서 화석이 되어 있는 오래전 자신의 기억을 떠올린다.
쉽지 않았다. 너무 만만하게 보았다. 실력만 있으면 문제없이 저들이 있는 곳까지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저들보다 나은 실력만 쌓으면 저들보다 높은 곳에서 저들을 내려다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저들은 자신의 위에 있었다. 자신이 저들의 위에 올라서서 하고자 하는 일들을 이미 저들은 지금 자신에게 할 수 있었다. 무언가 해보려 해도 그럴 기회조차 저들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저들의 허락이 있기 전까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비상상황에는 비상수단이 필요하다. 정상적으로 할 수 없다면 비상수단을 써야만 한다. 하지만 그 선택의 결과는 너무나 참혹했다. 그럼에도 그에게 주어진 기회란 고작 그런 것이었다. 도박의 결과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필 강동주가 실패의 대가로 굴러떨어진 곳이 카지노가 있는 정선이라는 점이 그래서 인상적이다.
만신창이가 되어 떨어진 곳에서 그러나 강동주는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던 옛사랑 윤서정(서현진 분)과 만나게 되었다. 윤서정(서현진 분)에게도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낯선 모습으로 그녀는 자신을 맞아주고 있었다. 손을 떨고 있었다. 외과전공의였는데 환자를 처치하는 손이 주체할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심지어 자신의 손목을 메스로 그으려 하고 있었다. 아니 상관없다. 무슨 일들이 있었든, 어떤 사연들이 감춰져 있든, 지금 당장 윤서정의 목숨이 위험했고 의사의 치료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굳이 자기가 나설 필요도 없이 이미 그녀를 수술할 의사가 있었지만 어찌되었든 자신이 그녀를 치료해야만 했었다. 강동주가 그곳에서 찾아야만 했던 조각이었다. 누군가를 간절히 치료하고자 하는 절실함. 본원으로 가기 위해 뇌물로 쓰려던 부서진 난화분이 마치 지금의 자신처럼 한심하게 나뒹굴고 있었다.
역시 기대한대로 윤서정의 연인 문선생(태인호 분)의 죽음은 윤서정과 강동주 두 사람에게 남겨진 숙제와도 같은 것이었다. 아마 윤서정의 기억에 손목을 긋고 자살한 여성은 어머니이지 않았을까. 병원장 도윤완(최진호 분)과의 관계도 미심쩍다. 어찌되었든 그녀가 문선생의 죽음에 그토록 큰 충격을 받고 지금까지 괴로워하는 이유도 그것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마치 자신이 강동주에게 이끌린 탓에 그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지 않은 것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만 같다. 문선생에 대한 죄책감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한 그녀는 의사로서 바로설 수 없다. 여자로서도 자신의 행복을 찾아나설 수 없다. 그렇다면 그 열쇠는 이 모든 일들의 시작인 강동주에게 있다. 다시 만난 강동주로 인해 자신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여전히 윤서정은 강동주를 의식하고 있었다. 강동주의 만남으로 인해 문선생에 대한 죄책감도 더 강해졌다.
의사로서 반드시 환자를 살리고 싶다는 순수한 동기를 돌려준다. 그럼에도 자신의 사랑이 죄악이 아닐 수 있음을 일깨워준다. 불행한 과거로부터 벗어나 당당한 한 사람의 의사가 되고, 과거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여성으로서 자유롭게 자신의 행복을 찾아 나선다. 그래서 두 사람은 만나야 한다. 두 사람에게 서로는 자신에게 결여된, 잃어버린 나머지 조각이다. 그를 다시 사랑할 수 있다면. 그녀를 살릴 수 있다면. 그녀를 살리고 그녀에게 당당해질 수 있다면. 단순한 남녀의 사랑이야기치고 너무 처절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처절한 것은 그들의 손에 목숨을 맡긴 환자들이다. 역시 정신없이 환자를 치료하는 장면들이 이어져야 한다.
분노에 떠밀려 의사가 되었다. 복수심에 필사적으로 노력해서 최고의 의사가 되려 했었다. 그러나 의사가 되고 나서 이제 자기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이미 의사로서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은 무엇인가. 아무때고 터지고 말았을 폭탄이었다. 그녀의 영혼 깊숙이 새겨진 상처에 스민 독이었다. 근본부터 치료해야 한다. 진실과 마주해야 한다. 자신의 답을 찾아내야 한다. 처음부터 결함투성이 인간들이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결함을 메꿔줄 열쇠를 서로가 가지고 있었다. 처음 서로를 의식한 순간 좋아한다 고백했고 자고 싶다 솔직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들은 다시 만났고 미뤄두었던 시간이 흘러간다. 상처는 곪을대로 곪아 터지고 난 뒤였다. 위기지만 기회였다. 고름을 짜내고 치료하면 흉터는 남지만 다시 괜찮아질 수 있다.
열쇠만 돌려서 문은 열리지 않는다. 단단히 문을 지탱해주어야 한다. 열쇠에 휘둘리지 않도록. 수술대위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여봤다. 고작 한 사람 죽이고 추락해버린 강동주에게 김선생은 그 위에 열 명은 더 죽이고 나서 자기에게 말하라 핀잔을 준다. 그동안 자신이 딛고 지나온 절망과 좌절의 숫자다. 그만큼 실패했고 또 그만큼 다시 일어나 지금까지 왔다. 아무나 실패하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일정한 실력과 경험을 갖추고 있어야 죽을만큼 위험한 환자의 수술을 맡긴다. 실패에도 자격이 있다. 그들을 지탱할 중심이다. 서로가 서로를 치유할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지킬 수 있도록. 그런데 그 중심이 너무 크고 강하고 무겁다.
베테랑은 이래서 베테랑이라는 것이다. 느닷없이 나타난 김사부의 눈빛 한 번 대사 한 마디에도 드라마의 분위기가 바뀐다. 확실히 누가 드라마의 중심인지 그것만으로 충분히 알 수 있다. 강동주가 아직 무색무취한 것은 그가 아직 평범해서 그렇다. 그저 평범하게 출세를 바라고 성공을 바란다. 오직 그것만을 위해 그동안 필사적으로 노력했고 전혀 포기할 생각이 없다. 세상에 치이며 길들여지고 묻혀 버렸다. 그는 과연 어떤 의사가 될 것인가. 성장이야기다.
매번 한순간도 드라마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한 바탕 활극 같다. 대사 한 마디 몸짓 하나가 모두 액션이다. 정교하게 계산된 듯 한껏 자신을 과시하며 보이고 들린다. 역시 드라마는 의학드라마라기보다 무협드라마다. 무공으로 사람을 죽이듯 의술로써 사람을 살린다. 상처입고 상처에 괴로워하면서도 의사로서 사람을 살리는 길을 간다. 뻔한 이야기를 진부하지 않게 들려준다. 드라마는 눈으로 보는 것이다. 쉽게 잊는 진실이다. 보는 것이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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