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말 그대로 형벌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내가 죽어야 한다. 다만 하루라도, 단 한순간이라도 그 모습을 더 보고 싶어 죽는 것마저 미뤘는데 자기가 죽지 않으면 사랑하는 사람이 죽게 된다. 자기가 살고자 하면 사랑하는 사람은 죽을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고자 한다면 더이상 자신은 사랑하는 사람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물론 답은 너무나 명확하지만 자신에게는 너무나 큰 고통일 터였다.
아니 어쩌면 이것이야 말로 신이 김신(공유 분)에게 베푼 마지막 배려였는지 모르겠다. 김신이던 시절의 회상이 단서가 된다. 당시 어린 왕은 적과 싸우려 출정하는 자신을 향해 돌아오지 말라 말하고 있었다. 왕인 자신마저 넘어선 장군 김신의 명성과 인기를 질투하고 있었다. 그동안 자신을 위한 전장에서 보여준 너무나 빼어난 김신의 실력에 어느새 두려움과 의심마저 품게 되었다. 그러니 이번에 나가면 죽거나 아니면 멀리 떠나 돌아오지 말라. 과연 그 말대로 따랐더라도 900년 전 그날 그토록 참혹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어쩌면 어린 왕을 위한다는 자만이었는지 모른다. 누이가 왕의 아내이고 자신은 왕을 위한 여러 전장에서 많은 공을 세운 공신이며 충신이다. 그에 걸맞는 대접을 받아야 한다. 말로는 아니라 해도 은연중 그런 내심이 행동으로 드러나고 있었는지 모른다. 노자의 가르침 그대로다. 이름을 이름이라 짓는 순간 이름은 더이상 사람들이 알던 이름이 아니게 된다. 충신이 스스로를 충신이라 여긴다면 더이상 그는 충신이 아니게 된다. 자신이 충신임을 주장하고자 왕을 거스르고, 자신이 충신임을 인정받고자 왕을 시험한다. 왕은 그래도 그를 죽이지 않기 위해 돌아오지 말라 아무도 모르게 명령까지 내리고 있었다. 돌아오지 않으면 죽이지 않을 것이며 그 주위 역시 살려둘 것이다. 하지만 돌아갔다. 왕의 충신으로서 자신의 자존과 만족을 위해서.
진정 왕을 위하려 했다면 왕의 말대로 돌아가서는 안되었다. 가족과 부하들을 살리려 했다면 그대로 떠나 영영 돌아가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돌아갔고 마지막 순간까지 왕과 맞서려 했다. 그는 충신이었을까. 그는 과연 억울하기만 했을까. 그렇게 자신의 질투심과 의심을 이기지 못한 어린 왕은 눈앞에서 자신의 충신에게 죽음을 내리라 명령해야 했다. 사랑하는 여인마저 그로 인해 목숨을 잃어야 했다. 왕이 죄를 짓도록 만든 것은 과연 누구인가. 옆에서 왕을 부추긴 간신인가. 아니면 끝까지 왕과 맞서며 그를 시험하려 했던 김신 자신인가. 어째서 김신의 부하는 김신을 향해 검을 휘둘러야 했었는가. 왕의 죄는 죄대로 그러나 김신의 죄도 역시 물으려 한다. 그때 김신이 했어야 하는 선택에 대해서.
이제까지의 사랑하기에 말없이 떠나겠다던 도깨비의 말은 단지 허세에 불과했다. 어차피 그 정도로 간절하게 지은탁(김고은 분)을 바라고 있지도 않았다. 더이상 지은탁을 보지 못하게 된다고 새삼 크게 괴롭거나 안타깝지도 않았다. 차라리 후련했다. 뭔가 대단한 일을 하는 듯 뿌듯하기조차 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살고 싶어한다. 다만 하루, 단 한순간이라도 지은탁의 곁에서 그녀의 모습을 보고 싶어한다. 그런데 그럴 수 없다. 더이상 그래서는 안된다. 그래야지만 지은탁을 살릴 수 있다.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더 간절하고 더 소중한 무엇을 위해서. 지은탁을 향한 자신의 감정인가, 아니면 지은탁 자신인가. 왕을 향한 자신의 감정이었는가, 아니면 왕 자신이었는가. 오랫동안 풀지 못했던 - 아니 있는지도 몰랐던 묵은 숙제를 이제서야 풀게 된다. 자신은 온전히 누군가를 위하지도 사랑하지도 못했다.
아마 그래서 첫사랑이라 말하는 모양이다. 처음으로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임금에 대한 충성을 연인에 대한 사랑에 빗대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이조년은 자신을 버린 왕을 님이라 불렀고, 정철은 왕에 대한 절절한 마음을 사미인곡에 담았다. 사미인곡의 미인이 바로 임금 선조였다. 신하로서 임금을 진심으로 섬기지 못했고, 오라비로서 동생을 진심으로 아끼지 못했다. 그러면 그동안 불멸의 삶을 함께 했던 유씨 일족에게는 진심을 다했는가.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누군가를 위하고 싶다. 자기를 포기해서라도 누군가를 위해주고 싶다. 단 한 사람이었다. 저주처럼 죽음을 앞두고 그런 사람을 만난다. 하지만 죽기 전에라도 그런 사람을 만나 진실한 사랑이란 것을 느껴 볼 수 있다.
이름에 대한 추측이 맞았던 모양이다. 그냥 이름을 쓰는 것이 아니다. 이름을 쓰는 순간 그 이름에 대한 모든 감정이 자연스럽게 그 안에 담기게 된다. 모든 원망과 미움과 분노가 이름 안에 담기게 된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이름을 매우 신정하게 여겼었다. 본명을 부르는 것조차 많은 경우 금기시되고 있었다. 부모가 아니라면 아예 상대를 업수이 여기는 경우에나 그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군자가 죽지 않는 이유다. 이름이 있음으로 해서 군자는 영원히 아름다운 이름으로 사람들 속에 살아있을 수 있다. 이름이란 단지 몇 개의 음절이 모인 단어가 아닌 특정한 대상을 가리키는 지칭이다. 그는 누구인가. 그것은 무엇인가. 사전을 찾아봐도 단어 하나에는 상당한 분량의 설명이 따라붙는다. 도깨비라는 이름에도, 지은탁이라는 이름에도 그를 설명하기 위한 많은 단어들이 필요하다. 그래서 형벌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는데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줄 이름이 없었다. 누구인지조차 사랑하는 사람에게 말할 수 없었다.
간절히 살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그는 살아있다. 필사적으로 죽음을 거부한다. 그래서 그는 살아있다. 그냥 죽지 못해서 사는 것이 아니다. 그저 죽지 않고 숨쉬고 있으니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존재하고자 한다. 무엇으로써 존재하려 하는가. 차라리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던 시절이 더 행복할 수 있다. 이름을 되찾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되찾는다. 써니(유인나 분)의 원래 이름은 김선이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불행한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운명이 아닌 다른 힘에 이끌려 다시 만나게 된다. 그곳에서 그들은 어떤 진실과 만나게 될까. 무엇을 선택하게 될까. 저승차사(이동욱 분)의 앞에 놓인 선택도 참혹하기만 하다. 하지만 삼신할미(이엘 분)는 그것이 사랑하는 아이들을 위한 배려라 이야기한다. 진실은 그저 아름답기만 하지 않다.
갈수록 철없어진다. 갈수록 유치해진다. 이것저것 장식이며 갑옷을 모두 벗겨낸 원래의 날모습이었을 터다. 수백년을 살았어도. 아무리 되바라진 청춘이라도. 웃었다 울었다 좋았다 싫었다 하루에도 몇 번 씩 날씨가 바뀐다. 마음이 바뀌고 생각이 바뀐다. 그러면서도 한결같이 향하는 곳이 있다. 어쩌면 저런 터무니없는 대사들로 이렇게까지 달달한 사랑이야기를 써낼 수 있는 것인가. 한심하고 멍청하기까지 한데 그래서 더 순수한 서로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도깨비나, 지은탁이나, 저승차사나, 그리고 김선이나. 다른 아무 계산도 고려도 없는 그냥 순수한 사람의 감정이다.
신의 시험이다. 형벌이며 기회다. 저주이며 축복이다. 더 어려워졌다. 지은탁도 알아 버렸다. 자기가 칼을 뽑으면 도깨비는 죽는다. 자기는 도깨비를 죽이도록 운명지어진 존재다. 아직 도깨비를 죽여야 자기가 살 수 있다는 사실까지는 모른다. 그래도 사실 자체는 바뀌지 않는다. 죽거나 죽이거나. 살리거나 살거나. 신이란 참 악취미적인 존재다. 진정한 의미에서 이 드라마의 악역인지도 모르겠다. 선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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