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사람은 놀리는 맛이고 괴롭히는 맛이다. 밥먹는 개를 건드리지 않는 건 개가 무섭기 때문이다. 개가 사랑스러우면 밥먹다 말고 캥캥거리고 멍멍 짖는 게 그리 귀엽고 사랑스럽다. 괜히 가만 있는 고양이 넘어뜨리고 자빠뜨리고 데구르르 굴리고. 멀쩡히 잘 노는 아이를 울리기도 하고. 물론 그러다 너무 지나치면 물리고 만다. 평생 원망을 들어야 하기도 한다.
나 역시 장실장(임원희 분)과 같은 마음이었다. 이 속보이게 서툰 커플을 어떻게 놀려야 잘놀렸다 소문이 날까. 한 눈에 서로 좋아하고 사귀는 걸 알겠는데 아닌 척 연기를 하니 어떻게 골려야 뿌듯하고 보람찰까. 이번 회차의 절반이다. 서로 좋아하면서도 아닌 척 사귀면서도 아닌 척 그런 주제에 영악하지도 못한 저 초짜커플을 어떻게 맛나게 재미있게 괴롭혀 먹을까. 나이가 몇인데 이런 풋내나는 연기까지 풀냄새 풀풀 나도록 잘도 소화해낸다. 영악한 순딩이고 생각만 앞선 순진이다. 아우 귀여워라.
결국 삶이란 투쟁이다. 그것은 본능이다. 먹는 것도, 입는 것도, 서로 사랑하는 것도 모두 투쟁이다. 그래서 마치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사랑을 할 때도 전쟁을 하듯 사랑을 한다. 비장하게, 엄숙하게, 영활하게, 교묘하게. 아마 의사가 주인공인 많은 드라마에서 전공을 외과로 설정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과목이야 어찌되었든 살이 찢기고 피가 튀는 가운데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긴박한 판단을 해야 한다. 사는가 죽이는가. 살렸느가 죽였는가. 그런 만큼 의사들 사이에 승부를 가르고 우열을 정하는데도 유리하다. 얼마나 그 순간의 긴박감을 살리는가에 작품의 승패가 갈린다.
진짜 무협드라마의 한 장면 같다. 처음부터 그런 인상을 받았다. 단지 의사가 주인공일 뿐 이 드라마는 무협드라마다. 아니나 다를까. 신회장(주현 분)의 수술이라는 큰 싸움을 앞두고 의사들이 모여 수술에 대한 회의를 하며 계획을 세운다. 적은 갈수록 강해진다. 단순한 인공심장수술에서 폐암말기수술까지 더해진다. 이길 수 있을까. 아니 싸울수나 있을까. 차라리 포기해야겠다고 선언하려는 순간 신회장이 갑자기 밀고 들어와 삶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그래도 살아야겠다. 그래도 수술받아야겠다. 그래도 싸워야겠다. 너희들과. 바로 눈앞에 있는 너희들에게. 신회장이 시한부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도윤완(최진호 분)과 딸인 이사의 음모가 시작되려는 순간이다. 살거나 죽거나. 살리고 이기거나 죽이고 지거나. 그야말로 신회장의 수술이 실패한 순간 김사부(한석규 분)는 물론 함께 수술에 참여한 모두는 의사로서 살아갈 수 없다.
과거의 악연이 나온다. 어떻게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던 의사 부용주는 의료계에서 사라지게 되었는가. 여전히 최고의 실력을 보이고 있음에도 부용주기 아닌 김사부라는 이름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도윤완이 강동주(유연석 분)에게 했던 말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자기가 부용주를 만들었다. 부용주의 명성도 모두 자기의 작품이다. 실력보다 위에 있는 것이 있다. 진실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그것. 의사가 되어 외과장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게 되자 수술마저 게을리하게 되었다. 높은 자리에 앉아서 괜히 낮은 곳에 있는 다른 사람들처럼 손발을 분주히 놀려서는 곤란한 것이다. 편하려고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이지 힘들자고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은 아니다.
그같은 김사부와 외과장 송현철(장혁진 분)의 차이를 단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환자를 앞에두고 환자보다 자신의 입지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환자의 상태를 진단함에 있어서도 오로지 자신의 체면과 권위만을 앞세우고 있었다. 어느새 강동주에게마저 추월당하고 있었다. 강동주에 비해 환자의 상태에 대한 진단도 틀렸고, 수술실에서도 송현철은 포기한 것을 강동주가 해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송현철은 과장이고 아직 김사부만 아니면 강동주의 처분을 결정하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과거 부용주에게 도윤완이 그랬던 것처럼. 세상의 부조리하고 모순된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고나 할까.
자신의 행동을 거짓으로 만드는 것은 결국 도인범 자신이었다. 마치 오랫동안 짝사랑해온 상대로부터 원래 자기도 좋아했었다는 고백을 듣는 심정과 같을 것이다. 어차피 자기따위는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며 지레 짝사랑마저 포기하고 있었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아무 여자나 골라 대충 결혼하고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상대에게 상처가 되는 일이었다니. 만일 자신이 조금만 노력했다면 짝사랑이 이루어질 수도 있었다고 말하고 있으니. 자기를 높이 보고 있었다. 의사로서 자신의 자질과 실력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을 배신해 버렸다. 그로부터 버림받고 말았다. 어서 빨리 이 돌담병원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분명 처음 도인범이 그처럼 거짓말까지 해가며 수술방에 들어갔던 것은 의사로서 어떻게든 환자를 살려야만 한다는 오로지 그 하나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언제 수술이 있을지도 알지 못하면서 몇 번이나 수술동영상을 보며 시뮬레이션도 했었을 터였다. 처음 하는 수술인데도 큰 실수 없이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몇 번이나 반복해서 돌려보고 또 그때마다 다시 몇 번이나 시뮬레이션으로 연습해 본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연습은 연습 실전은 실전 실제가 아닌 가상의 연습만으로는 한계를 드러내고 만다. 만일 그때 도인범 앞에 있었던 것이 오랜 열등감의 대상인 강동주가 아니었다면. 그래서 솔직하게 자신의 모자람과 한계를 인정할 수 있었더라면. 그러나 그는 수치스럽고 아픈 자신의 진심보다 괜한 허세를 앞세우고 말았다. 그리고 그로 인해 김사부로부터 거부당하고 말았다.
어린 때문이다. 자기의 진심이 무엇인가 알기에는 아직 너무 어린 것이다.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감추고 숨겨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아버지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한결같이 인정받고자 했던 가장 두렵고 존경하는 대상이 그의 뒤에 있었다. 아버지를 만족시켜야 한다. 아버지에게 인정받아야 한다. 하지만 결국 의사로서 자신은 오로지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다. 아버지의 대신이 아니다. 아버지가 자기의 대신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강동주도 거쳐온 과정이다. 이제 성장을 마치고 외과장 송현철마저 뛰어넘어 의사로서 자기가 할 몫을 충실히 해낼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 과제다.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의사가 필요하다. 충분히 성장한 실력있는 의사가 있어야만 한다. 연화(서은수 분)는 합류가 너무 늦었다. 그냥 귀엽다. 안타깝게도 그녀에게까지 성장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을 듯하다. 마지막 큰 싸움을 앞두고 모두가 긴장한 가운데 서로의 관계를 들키기 싫은 강동주와 윤서정(서현진 분) 커플의 뻔히 보이는 발버둥이 그저 귀엽고 유쾌하기만 하다. 경직을 풀어주는 윤활제와 같다.
이제부터 달력가야 한다. 더이상 숨기는 것도 없고 다른 곳에 한눈팔 여유도 없다. 도윤완의 야망이 지금껏 받들어모시던 신회장마저 포기하게 만든다. 시한부 생명의 신회장과 그 딸을 앞세우고 김사부와 도윤완은 부딪히고야 만다. 승부는 너무나 간단하다. 의사로서 살리면 이기고 살리지 못하면 진다. 한 번의 수술에 모든 것이 걸렸다. 나머지는 그를 위한 과정이며 장식일 뿐이다. 오로지 하나다. 숨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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