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났을 때 소현자는 황제가 아니었다. 황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더이상 소현자가 아니었다. 위소보에게 친구란 소현자 뿐이었다. 이후 강호에서 다양한 많은 친구를 사귀기는 했지만 그래도 처음부터 끝까지 위소보에게 친구라 할 만한 것은 소현자 한 사람 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친구가 어느 순간부터 황제가 되더니 갈수록 황제가 되려 하고 있었다.
위소보가 강희제를 떠난 이유는 김용 스스로 더이상 친구로서가 아닌 황제로서 두려움으로 대하게 된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전에는 그저 시답잖은 농담도 웃으며 곧잘 하고는 했는데 더이상 그렇게 마음놓고 웃을수도, 웃고 나서도 그저 즐겁기만 하지도 않다. 더이상 그곳에 자신의 친구 소현자는 없었다. 갈수록 황제가 되어가며 이제는 단지 황제에 불과한 강희제만이 있을 뿐이었다. 만일 진정 강희제가 위소보를 친구로서 여기고 있었다면 위소보가 의리를 중시여기는 것을 알면서 그로 하여금 천지회를 섬멸토록 압박하지 않았을 것이다. 끝까지 의심하며 주위에 사람까지 붙여두고 있었다. 자신은 이제 강희제에게 신하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천지회 식구들이 자신에게 전과 같이 대하는가. 사실 위소보가 천지회에 몸담게 되었던 것도 순전히 천지회 회주였던 진근남의 영향이었다. 진근남의 결정으로 그의 제자가 되었고 청목당의 향주가 되었다. 진근남이 사라지고 사실상 천지회와 이어주던 끈도 사라지고 만 것이다. 형제의 의리가 아닌 애당초 천지회가 만들어진 목적인 반청복명만이 남는다. 더이상 친구로서 형제로서 함께 어울리기에는 천지회로서의 목적이 우선하고 있었다. 아무리 황제가 더이상 친구인 소현자가 아니게 되었다지만 아무것도 없이 강희제만을 목표로 그를 죽이기 위한 활동을 한다는 것은 무리다. 지켜야 할 의리조차 남지 않았다.
이놈도 저놈도 다 자기가 좋아하고 또 의리를 지켜야 할 대상이기에 어쩔 수 없이 저버리게 된 것이 아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먼저 자기를 버리고 의리를 저버렸기에 더이상 지켜야 할 의리 자체가 남아있지 않은 탓이었다. 위소보가 세상을 버린 것이 아니라 세상이 위소보를 버렸다. 그를 형제로 여기던 사람도 친구로서 대하던 사람도 이제 더이상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있다면 어쩔 수 없이 정으로 엮인 그의 일곱 아내들만이 있을 뿐. 그래서 아내들과 함께 천하를 떠나, 강호를 등지고 운남 대리로 은거한 것이었다.
진용인가 하는 어설픈 작가가 대충 끄적인 '속녹정기'를 단지 서문만 보고도 접어버리게 된 이유다. 도대체 위소보에게 다시 은거를 깨고 강호로, 황궁으로 돌아가야 할 이유가 어디 남아있었던가. 은거생활이 지루해졌다 하는데 그보다 더 지겨워진 것이 바로 황궁생활이었고 강호에서의 생활이었다. 그런데도 지겹다며 강호로 돌아가 이미 인연마저 모두 끊어진 이들과 함께 어울리려 한다.
대부분 속편들이 전편에 비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이유다. 이미 완결된 이야기인데 불필요하게 사족을 붙인다. 그 사족들이 군더더기가 되어 전체적인 조화를 해친다. 하물며 작가의 의도조차 이해 못하는 떨거지라면 말할 것도 없다. 세상에 나와서는 안되는 속편이라는 것도 있는 것이다.
원래 위소보는 강호인이 아니었다. 관리도 아니었다. 그저 양주 유곽의 기녀가 낳은 하층민에 불과했다. 단지 이야기로만 듣던 협객들의 의라는 그래서 어린 위소보에게 대상으로서 이상화되기 쉬웠다. 친구의 우정이나 의리 같은 것은 그러나 위소복가 생각한 것과는 많이 달랐다. 약간의 우화이기도 할 것이다. 만일 이 작품을 사회주의자가 썼다면 의리니 우정이니 하는 것도 사실은 지배층의 가식에 불과하다 여기게 되었을 것이다. 어디에도 위소보가 생각한 의리 같은 것은 없었다. 역설적으로 그래서 '녹정기'에서 가장 의리를 충실하게 지킨 인물은 다름아닌 위소보 한 사람 뿐이었다.
강호인도 아니고 관리도 아닌 위소보의 눈에 보이는 강호인과 관리란 어떤 모습인가. 천지회의 군웅들이며 조정의 관리들이며 황제가 가진 모순들이 그런 위소보를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진다. 의란 무엇이고 협은 무엇이며 정은 무엇인가. 김용이 붓을 꺾은 이유와 관계있지 않을까. 그냥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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