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눈 한 번 질끈 감으면 된다. 어차피 말해도 들어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내가 옳아도 옳다고 말해주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내가 억울하다고 억울하다고 말해주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냥 한 번 꾹 첨고 없었던 일로 여기고 나면 당장 자기가 편해진다. 아무렇지 않다고. 아무일 없다고. 그런데 하필 눈앞에 자기 말을 들어주고 자기의 편이 되어줄 사람이 자기보다 더 화난 얼굴로 서 있었다.
모두가 알고 있다. 세상에 정의따위는 없다. 공정한 세상따위는 없다. 승자가 정의로우니 세상도 정의로운 것이다. 승자가 정의로워야 하기 때문에 승자가 되기까지 세상은 공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여기까지 왔으니 지금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은 그에 대한 정당한 대가다. 어려서부터 부모로부터 학교 선생님들로부터 그렇게 배운다. 나중에 성공하면 네 마음대로 해도 된다. 나중에 열심히 노력해서 좋은 대학 가고 돈 많이 벌면 너 하고 싶은대로 마음대로 해도 누가 뭐라 하지 않는다.
승자가 되지 못한 패배자들의 분노는 단지 질투이고 열등감일 뿐이다. 자기가 성공하지 못한 데 대한 탓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려는 것 뿐이다. 그래서 패자의 분노는 부도덕하고 사악하다. 염치없고 비열하다. 오히려 조롱과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차라리 내가 잘못했다. 내가 약자이기에 내가 잘못한 것이다. 내가 승자이지도 강자이지도 못하니 나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 납득하고 넘어갈 수 있으면 더이상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먼저 남에게 속고, 그리고 자기를 속이고, 그 다음에는 남을 속인다. 서로가 서로를 속이는 사이 그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최애라(김지원 분)가 백화점에서 부당하게 모욕을 당하고, 당장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무릎을 꿇고, 끝내는 자기의 편을 들어주려는 고동만(박서준 분)에게 화내는 장면들이 그렇게 이어진다. 그리고 그 연장에 호의를 가지고 자신에게 다가서는 박무빈(최우식 분)에 대한 무심한 거짓말들이 있다. 속이려 해서가 아니라 그냥 속이게 되었다. 일도 그만뒀으면서 괜한 허세로 돈을 쓰고, 박무빈의 억측에도 장단을 맞추며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한다. 공교롭게도 바로 그 순간 고동만은 김탁수(김건우 분)의 하수인 양태희(채동현 분)에게 속아 함정으로 걸어들어가고 있었다. 젊은 혈기로만 살기에는 세상이 너무 더럽게 오염되어 있다. 자기도 더러워지거나 아무렇지 않다고 속이거나. 자기를 속아고 남을 속이고 서로를 속이며 결국에는 속이지 않게 된다.
김주만(안재홍 분)이 백설희(송하윤 분)를 속인 것도 그만큼 현실이 비틀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르지 않았다. 아니 모를 수 없었다. 회사에서 계약직이 놓인 현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나 사회에서나 신분은 물론 처우나 급여 모두에서 한참 불리한 계약직으로서 벌써부터 장래가 촉망되는 유력사원 김주만과 연인관계라는 사실이 얼마나 큰 부담일지 너무나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물며 조건에서 너무 크게 비교가 되는 장예진(표예진 분)이 호감을 가지고 김주만의 주위를 맴돌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마음의 불안과 동요가 얼마나 클까. 하지만 정작 김주만이 거짓말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 역효과로 백설희의 두려움만 더 키우고 말았다. 이대로 자기가 계속 김주만의 곁에 남아있어도 좋은 것일까.
아이들이 천진하다 말하는 이유다. 아이들은 순수할 것이라 믿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사정을 알지 못하니까. 어른들의 사정따위 모르므로 상관않고 솔직한 사실만을 말하려 할 것이다. 그래도 서로에 대해서만큼은 누구보다 솔직할 수 있었다. 아직 아이이던 시절 그대로인 양 최애라나 고동만이나 김주만과 백설희 커플과는 달리 속이거나 숨기는 일 없이 솔직할 수 있다. 그래도 된다. 서로에게는 그래도 된다. 그래도 최애라는, 고동만은 그런 자신의 진심을 있는 그대로 받아줄 것이다. 이미 서로를 좋아하면서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것도 어쩌면 연인보다 더 소중할 수 있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고향집과 같다. 멋대로 세상을 떠돌다가 아무때고 돌아가도 반갑게 맞아줄 것 같다. 정확히 익숙한 비난과 놀림으로 자신을 맞아줄 것 같다.
그래서 박혜란(이엘리야 분)와 최애라는 벌써부터 저리 적대적인 관계인지 모른다. 진짜 아무때고 필요하면 돌아온다. 제멋대로 남자를 만나 사귀고 결혼까지 한 뒤에도 이별을 하고 나면 다시 고동만에게로 돌아온다. 원래는 최애라의 몫이었다. 최애라가 그랬어야만 했었다. 사실 이미 그러고 있었다. 헤어짐조차 필요없는 친구의 모습으로.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첫 좌절을 겪는다. 현실과 마주한다. 고동만이 선택한 그의 길을 처음으로 정면에서 보게 된다. 10년의 공백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꿈은 현실이 아니었다. 아직까지 자기에게 꿈이란 망상에 지나지 않았다. 힘들고 고통스럽다. 몇 번이다 너 꺾이고 부숴질지 모른다. 원래 꿈이란 그런 것이다. 좌절을 각오하지 않으면 도전도 할 수 없다. 편한 길을 걸어왔다. 비난할 수는 없다. 그들은 꿈을 꾸려 한다. 출발선에 서지도 못했다. 아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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