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에는 링위에서 싸우다가 목숨을 잃는 것을 어떤 로망처럼 여기고 있었다. 시작은 일본만화 '내일의 죠'였다. 하얗게 모든 것을 태운 채 링사이드에서 고개를 떨구고 있던 주인공 야부키 죠의 모습에서 일본은 물론 한국의 대중들까지 어떤 카타르시스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사람이 산다면 그렇게 살아야 한다.
하지만 그로부터 수십년이 지나 같은 일본에서 출판된 '태랑'이라는 만화에서는 그런 것과 상관없이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내일의 죠'의 주인공 야부키 죠는 고아였다. 부모도 형제도, 하다못해 마음을 나눌 친구나 연인조차 하나 없는 외로운 처지였었다. 고작 링위에서 야부키 죠가 목숨을 잃는다고 슬퍼할 사람이라고는 관장 단페이와 스폰서이자 연인 비슷한 사이였던 시라키 요코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사람이 누구나 야부미 죠처럼 주위와 단절된 외로운 처지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남겨진 사람이 있었다.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연인이 있었다. 자기 선수를 링위에서 잃은 관장 단페이의 처지는 어떠할 것인가. 그래도 나름대로 인연을 맺어 온 사람들도 있는데 링위에서 자기가 죽으면 그들이 받을 충격은 어떠할 것인가. 싸우는 것은 자기만족이다. 이기든 지든 승부와 상관없이 링위에서 자기를 증명하고 싶은 것은 오로지 자기만을 위한 이기였을 터였다. 그러나 그렇게 승부에서 이기고, 혹은 승부에서 지고, 아니면 승부와 상관없이 다친 모습을 보였을 때 주위에서 느끼는 감정마저 자신과 상관없는 것이겠는가. 오히려 자신보다 더 아파해주고 슬퍼해줄 사람이 바로 가까이에 있었다.
쓰러진 것은 김탁수(김건우 분)가 아니었다. 최애라(김지원 분)가 본 것은 고동만(박서준 분)에게 맞아 쓰러진 김탁수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맞아 쓰러진 고동만의 모습이었다. 항상 이길 수는 없다. 항상 강할 수만 없다. 누군가 더 강한 상대를 만나면 고동만 역시 김탁수와 다름없는 처지가 된다. 그것이 링이다. 그것이 싸움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멋지게 포장해도 격투기의 본질은 몸과 몸이 부딪히는 싸움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하필 고동만마저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못할 짓이다. 이렇게나 사랑하는 사람인데 상처입고 고통받고 심지어 망가지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봐야 한다는 것은.
그러니까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물질로 하는 것도 아니다. 백설희(송하윤 분)가 김주만(안재홍 분)에게 바란 것은 그런 사소한 것들이 아니었다.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몸으로 느낄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마침내 고동만과 최애라도 마음만이 아닌 몸으로도 서로 이어지게 되었다. 사회하부구조가 사회상부구조를 결정한다. 형이하학이 형이상학을 결정한다. 결국 진심을 전할 수 있는 것은 김주만 자신의 몸이었다. 직접 행동이었었다. 사랑하지만 단지 믿지 못했고 그 불신과 불안을 견디지 못했다. 김주만에게도 다시 기회가 올까? 잃어버린 것의 크기만큼 절박함이 더이상의 생각을 멈추게 만든다.
누가 황복희(진희경 분)의 자식일까? 누가 황복희가 낳은 아이의 아버지인 것일까? 다만 고동만이나 최애라 또래인 황복희의 아들 김남일(곽시양 분)을 두 사람의 아버지가 전혀 몰라보고 있었다. 유기동물의 비유가 확실히 와닿는다. 가정에서 동물을 유기할 때 어쩔 수 없다며 내세우는 이유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바로 임신과 출산이다. 더 사랑해야 할 대상이 생겼기에 지금껏 가족처럼 여기던 동물을 아무렇지 않게 내다버린다. 진짜 가족이 생겼다. 진짜 자기의 아이와 만나게 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버려짐을 예감한 아들 김남일의 선택은 무엇일 것인가. 그다지 멀리 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남은 분량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 비틀었다다는 수습이 불가능해질 수 있다.
다시 한 번 최애라와 박혜란(이엘리야 분)의 처지가 대비된다. 영리해 보였다. 현명해 보였다. 덕분에 많은 것을 가지게 된 듯 보였다. 하지만 세상은 냉정하다. 박혜란이 속한 세계는 그녀가 바라보던 그곳이 아니었다.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을 때 더 잔인하게 내동댕이쳐져야만 했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있었다. 원래 그녀가 살던 세계에도, 그녀가 꿈꾸던 그곳에서도. 지금 그런 그녀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한 가지 더이상 초라한 모습을 보일 수 없다는 자존심 하나였다. 두려워한다. 고작 오디션인데도 자존심을 핑계로 도망치고 만다. 진지해져서 실패한다면 더이상 도망칠 곳도 남아있지 않게 된다.
진짜 자기가 꿈꾸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무엇을 그토록 간절히 바라며 그려왓던 것일까? 아나운서였을까? 아나운서의 손에 들린 마이크였을까? 남들이 보기에 메이저인 것 같다. 그러나 자신이 있기에 그곳은 메이저가 된다. 아직 젊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라는 대책없는 낙천까지 있다. 화가 난다. 벌써 아주 오래된 이야기인 것 같다. 내가 나 자신이 선 이곳을 메이저로 만들고야 만다. 하긴 저놈의 커플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가 염장이다. 보다가 TV를 꺼버리고 싶었다. 너무 사랑스러워도 사람들은 견디지 못하는 법이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인내할만큼 사람은 성인군자가 아니다.
고동만의 격투기는 동화였다. 판타지였다. 모두의 꿈이었다. 내가 다시 원래의 꿈으로 돌아갔을 때 다시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게 될 것이다. 그냥 여름밤 최애라의 무릎에 기대어 잠들었다가 꾼 개꿈이라 해도 좋다. 그래도 고동만에게는 격투기가 있었다. 쓸쓸한 여름밤이다. 오랜 향기가 못견디게 몸서리쳐진다. 화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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