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조작 - 세상을 바꾸는 힘, 언론이 존재하는 이유

까칠부 2017. 9. 13. 08:59

예상한대로였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작년말부터 올해까지 일 년이 채 안되는 시간동안 일어난 일들이 얼마나 말도 안되는 것들이었는가 깨닫게 해주었다. 설마 사무실에 버리고 간 태블릿 하나가 하나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강고하기만 하던 보수정당마저 지리멸렬케 만들 줄이야.


선이란 악을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정의란 그 악을 미워하는 것이다. 선이란 그저 악하지 않은 것으로 충분하지만 정의는 이미 존재하는 악과 부딪혀 그것을 부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 부딪히고 깨지고 그러면서도 한 걸음씩 앞으로 나갔던 것이 지난 수 천, 아니 수 만 년 인간의 역사였다. 소수의 정의로운 이들이. 어쩌면 아주 적은 수의 정의를 지키고자 했던 이들이. 불가능할 것을 알면서도 악과 싸우며 조금씩 지금의 세상을 만들어 왔었다. 그자는 바로 그 최선두에 있었다.


처음 언론이라는 것이 만들어지고 기자라는 직업이 탄생했을 때 그 가운데 상당수는 시대를 움직이던 지식인, 사상가, 혁명가들이었다. 불의한 세상을 고발하기 위해 스스로 언론을 만들고, 어떻게 세상을 올바로 바꿀 것인가를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기사를 쓰고 있었다. 프랑스혁명에서도 당통, 마라, 로베스 피에르 등 핵심주역들이 언론을 통해 자신들의 주장과 혁명의 정당성을 알리고 있었으며, 러시아혁명의 주역 가운데 하나인 트로츠키 역시 일찌기 신랄한 논설로 이름을 알린 편집자 출신이었다. 중국공산당의 창시자인 진독수 역시 잡지 '신청년'을 창간하여 신문화운동에 앞장섰고 마오쩌둥은 바로 이 '신청년'에 기고함으로써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굳이 비틀어 보자면 선전선동이지만 이념과 신념의 측면에서 그것은 정의의 실현을 위한 필수적인 선택이었다.


그것이 옳지 못하다 여겼기 때문에. 그것은 악이고 불의라 여겼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진실을 밝혀 악을 응징하고 죄를 벌주려 했었다. 불의를 경고하고 정의를 세우고자 했었다. 물론 그것은 보수언론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단 하나, 그것이 오로지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면. 사실이 배제된 정의란 그저 관념에 불과하다. 사실이 결여된 정의란 것은 단지 몽상에 지나지 않는다. 심지어 자신의 정의를 위해 사실까지 만들어낸다면 그것이야 말로 의도된 선동이고 기만일 것이다. 어느새 사람들이 잊어가고 있던 언론의 참모습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오로지 한 가지 진실을 쫓고 사회의 정의를 바로세운다. 기자란 원래 가장 정의로운 이들이 선택했던 직업이었다. 정의롭지 못한 현대의 언론에서 한무영(남궁민 분)은 차라리 기레기가 된다.


결국 그렇게 끝나나 싶었다. 모든 사실이 밝혀지고, 그럼에도 많은 증거와 증인들이 사라지며 더이상 그 위까지 쫓아가 책임을 묻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조영기(류승수 분)도 구태원(문성근 분)도 그저 필요없어지면 버리는 장기판의 말에 불과했다. 그냥 이대로 모든 진실은 저들이 가진 힘에 의해 어둠에 묻히고 마는 것인가. 그러니까 기자라는 것이다. 한무영이 기자를 그만두려는 순간 자신의 핸드폰으로 걸려온 한 통의 제보전화가 그의 발목을 붙잡는다. 내내 바보같은 웃음을 흘리며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게 역사를 바꾼 어처구니없는 증거 하나가 사무실 서랍에서 발견되고 있었다. 누가 세상을 바꾸는가? 정의로운 기자 하나가 역사의 물줄기를 크게 돌려놓을 수 있다.


이미 한무영은 기자였다. 원래 맞지 않는 직업이었다고 하지만 기자라는 직업에 익숙한 순간 그는 이미 기자였다. 무엇보다 정의로웠다. 악을 미워할 줄 알았다. 그 악과 싸울 줄도 알았다. 그를 위해서는 기꺼이 자신을 내던져 싸울 수 있었다. 특종이란 그 과정에서 주어지는 부상에 지나지 않는다. 권소라(엄지원 분)와의 관계는 그렇게 또 미묘하게 끝맺고 만다. 원래 그런 드라마가 아니기도 했었다.


어찌보면 유치하기도 하고, 어찌보면 황당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어차피 현실이란 때로 작가의 상상력을 아득히 뛰어넘기도 하니까. 그동안 우리 사회에 있었던 여러 사건들을 그러면서도 전혀 어색하지 않게 잘도 기워 잇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에는 대한일보도 애국신문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