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마더 - 방치되는 아동학대, 참을 수 없는 답답함

까칠부 2018. 1. 25. 06:59

하긴 모든 집단의 시작은 가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국가란 결국 가장을 중심으로 한 가부장체제의 연장이었다. 가족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마을이 모여 하나의 지방을 만들고, 그 지방이 모여 하나의 나라가 된다. 그래서 가족이란 모든 사회에서 기초적인 체계로서 항상 존중되었었다. 정확히 방치되었었다. 가족에 대한 모든 책임과 권한은 가장이 갖는다. 가족 이외에는 그에 대해 관여하거나 간섭할 수 없다.


심지어 가장이 사적으로 가족을 살해해도 죄가 되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어렸을 적 들었던 전래설화에도 그런 이야기들이 적지 않다. 먹을 것이 부족해서 부모가 굶주릴 지경이 되자 먹는 입이라도 줄이려 자식을 내다버리는 것도 효도라 여겨졌었다. 하긴 국가에서 굶주림을 면하게 조금이라도 도왔다면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교장의 태도 그대로다. 돕는 것은 귀찮고 성가시다. 내 시간과 노력과 무엇보다 돈이 들어가는 일이다. 그러느니 알아서 살도록 내버려두자. 부모가 살기 위해 자식을 내다 파는 것도 부모가 가진 권리다. 어차피 세금을 내는 것도 가장들이고 모든 납세와 부역은 가정을 단위로 부과되고 있었다. 이를테면 납세자로서의 권리였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 또한 가부장이었던 군주들의 무책임이기도 했다.


물론 지금 이른바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들에서는 당연히 그런 것 없다. 갓태어난 아이도 국민이다. 세금을 낼 수 있는 수입도, 국가를 위해 필요한 노동력도 당연히 제공할 수 없지만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아이들조차 국민으로 여겨진다. 당연히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 부모가 없으면 대신 길러주고, 설사 부모가 있더라도 항상 신경쓰고 보살펴준다. 국가의 권력은 가정이 아닌 개인을 단위로 모든 개인에게 미쳐야 한다. 전근대적인 사회일수록 그래서 가정의 배타성은 존중되고 선진적인 사회일수록 가정의 문제마저 공적인 영역에서 관리된다. 그러면 우리 사회는 지금 어디쯤 머물러 있을까?


한국사회의 복지원칙은 한 마디로 재가주의다. 각자 집에서 알아서 하라는 것이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도, 늙은 부모를 모시고 보살피는 것도, 그래서 세금도 적다. 그나마 알량한 국민연금이나 건강보험도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풀어달라 칭얼댄다. 늙어서 일도 못하고 수입이 없어 곤란을 겪어도, 당장 병원비가 없어 죽을 상황에 놓여도 그마저 자기가 책임질 자기 권리라는 것이다. 국가에 대한 불신이기도 하고, 국가의 무책임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다. 공동체라는 의식마저 희미하다. 나 자신, 내 가족, 혹은 나의 학연과 지연, 혈연만이 자신이 책임질 전부다. 그래서 한국인의 애국심이라는 것도 사실 모호하다.


그냥 화가 났다. 아이가 학대당하는 것을 알면서도 주변의 어른 모두가 방치하고 있었다. 사실상 방법이 없다. 심지어 가족으로부터 상습적으로 성폭행당한 피해자를 부양의 책임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가해자인 가장에게로 돌려보낸 판결마저 있었다. 친부에게 돌려주고, 양부에게 돌려주고, 혹은 양육하던 친척들에게 돌려주고. 그래서 친권을 천륜이라 말한다. 하늘이 강제한 절대의 규범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아이들은 국가의 무책임 속에 여전히 가족으로부터 학대당하고 끝내는 목숨까지 잃기도 한다. 하나 죽고 나면 그때서야 한참 떠들다가 자기 자식 문제로 돌아올까 다시 침묵하고 만다. 영리하다. 그래서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아동학대 문제는 사회적인 무책임과 방치 속에 현재진행으로 남아 있다.


차라리 사람보다는 새에 관심을 갖는다. 어딘가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텃새가 아닌 때가 되면 떠나가는 철새를 쫓아 여기저기 떠돌아 다닌다. 인간에 대한 어떤 애정도 관심도 없이 자신 또한 철새처럼 사람들 사이를 철새처럼 겉돌고 있었다. 그냥 흔한 모성이었을까? 아니면 인간적 연민과 동질감이었을까? 같은 인간으로서. 나와 같은 인격체로서. 그래서 이제 겨우 몇 번 보지도 못한 사이에도 아이가 겪은 고통을 공감하면서. 그것이 단지 여성으로서 아이를 낳고 기르기 위한 본능이라는 것은 너무 슬프지 않은가. 인간이 가져야 할 가장 기본이 되는 양심과 이성의 문제라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어렸을 적에도 주위에서 흔히 보았고, 지금도 어디선가는 실제로 있을 이야기일 것이다. 낳아서 부모가 아니다. 낳기만 했다고 부모가 아니다. 아직 부모가 될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아이부터 낳는 것은 모두에게 불행이다. 그렇다고 자격이 안되면 부모가 되지 말라 강제할 수도 없다. 모두가 답을 아는데 그러나 내 수고, 내 시간, 내 돈이 그것을 위해 쓰이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답을 알지만 풀 수 없는 문제랄까?


내내 답답해서 걍 채널 돌려버릴까 하면서 보고 있었다. 가끔은 아예 고개돌려 외면하기도 했었다. 이런 드라마는 진짜 힘들다. 그래도 두 사람이 만났다. 상처투성이 두 사람이 서로의 상처를 보듬을 상대를 만났다. 친구처럼. 연인처럼. 그리고 가족처럼. 그러나 지독한 이 사회의 현실은 두 사람을 결코 그냥 놓아두지 않을 것이다. 마치 오래된 이야기처럼 한 여자와 한 아이는 여행을 떠난다. 먼 하늘로 날아오르는 철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