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전 '수호전'을 보면 온갖 인간말종들이 나온다. 사람을 죽여 그 고기를 먹는 것은 차라리 일상이다. 어린아이마저 가리지 않고 무참히 죽이고,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이겠다고 무고한 사람에게 죄를 조작해서 뒤집어 씌우고, 심지어 그 일가친척마저 죄에 연루되어 죽게 만든다. 악역들 이야기가 아니다. 주인공인 양산박 호걸들의 이야기다. 그런데도 중국 민간에서는 이런 범죄자들 이야기가 인기가 있었다. 엄밀히 중국무협이란 중앙의 권력에 대항하는 범죄자들의 이야기다. 어째서 그런가.
영국의 로빈후드 이야기만 하더라도 결국 정부에 대한 불만과 반발이 범죄자인 로빈후드를 통해 투영된 것이었다. 그저 도둑놈에 불과했던 조세형이 대도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세간에 화제가 되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홍길동이든 임꺽정이든 장길산이든 도적은 도적일 뿐일 텐데도 어느샌가 의적으로 불리고 있다. 그만큼 누군가 자신을 대신해서 정부에 대항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법을 어기고 범죄를 저지르는 것마저 그래서 정부에 대한 저항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권력과 법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개인은 편법과 불법에 기대는 수밖에 없다. 범죄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정상적인 권력에 기댈 수 없는 환경에서 심지어 평범한 개인들마저 범죄에 기대어 자신의 안전을 꾀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니까 하필 혜나(허율 분)을 사고로 위장해서 무령을 도망치고 수진(이보영 분)이 처음 의지한 상대가 인신매매까지 일삼던 노파였다는 사실이 무척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어째서 수진은 법에 기대지 않았을까. 법에 기대어 밝은 곳에서 혜나를 지키고 보살피려 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과거 혜나와 마찬가지로 학대당했으면서도 보호받지 못했던 자신의 기억이 투영된 때문은 아니었을까. 결코 자신을, 자신과 같은 처지의 혜나를 세상은 지켜주지 않을 것이다. 기대해 봐야 실망하고 믿어 봐야 배신당한다. 그러니까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누구도 믿지 않는다.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면서도 혹시라도 자신이 잡히게 될 만일을 대비한 것이다. 일단은 무작정 대한민국을 떠나 아이슬란드로 가야만 자신도 혜나도 안전하다.
아마 수진에게 학대의 기억이 없었다면 판단은 달랐을지 모르겠다. 정면으로 사실과 마주하며 기꺼이 싸우고자 했던 열혈교사 송예은(송유현 분)은 그런 상식적인 범주에 속하는 경우였다. 하지만 무력했다. 그것이 중요하다. 만일 송예은의 주장이 현실에서 받아들여졌다면, 그래서 송예은의 의도처럼 혜나가 안전해질 수 있었다면 굳이 수진이 혜나를 데리고 도망칠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안 될 것을 알았고 그래봐야 소용없을 것을 알았다. 그래서 경찰이 아닌 자신이 법이 아닌 범죄를 저질러 그것을 해결하려 한다. 이 사회의 질서와 제도가 아닌 오로지 자신의 선의만으로 그것을 벗어나 혜나를 구하려 한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구원이기도 했다. 어렸을 때는 무력하게 저항도 못하고 학대를 받아들여야 했지만 이제는 또다른 학대당하는 자신을 구할 수 있었다. 새가 어떻게 날아갈 수 있는가를 궁금해 한다. 사람은 어떻게 그토록 꿋꿋하게 현실을 딛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참 악연이다. 그래서 겨우 무령을 벗어나 도망치는 버스에서 하필 혜나를 학대하던 엄마 자영(고성희 분)의 애인 설악(손석구 분)에게 얼굴을 보이고 만다. 살아있으면 더 곤란해진다. 형사 창근(조한철 분)은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마저 가정하며 끝까지 수사하려는 의지를 보인다. 단지 어찌할지 몰랐을 뿐이었다. 자영의 입장에서 자신이 낳은 아이였지만 정작 그 아이를 기를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었다. 아마 어려서 엄마를 잃었던 듯하다. 지금도 주위에 기댈만한 어른은 보이지 않는다. 설악은 애인이기 이전에 그녀기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었다. 마치 수진에게 무작정 기대는 어린 혜나처럼 설악의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 그 기막한 혼돈과 모순이 결국 혜나를 쫓는 가운데 어떤 변화를 보이게 될까.
자신이 낳은 딸로부터 버림받은 엄마와 자신이 낳지도 않은 딸을 지키려는 엄마가 나온다. 무심결에 지나치듯 자신의 아들마저 내버린 채 도망친 어느 베트남 여성의 이야기가 나온다. 하필 그 아들을 내다팔려는 노파는 불임을 상징하는 듯 보였다. 뒤늦게 딸을 찾으려는 엄마와 뒤늦게 딸을 찾아 그 뒤를 쫓으려는 엄마, 그리고 그들에게 쫓기는 엄마가 나온다. 엄마가 되지 못한 딸과 엄마가 되어 버린 딸과 그리고 엄마를 찾은 딸이 나오고 있다. 제목 '마더'란 그래서 꽤 여러가지 뜻으로 해석된다. 비단 혜나와 수진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그보다 현실의 수많은 비극들에 대한 고발이지 않을까. 그런 수많은 평범할 수 없는 엄마들처럼. 그냥 이야깃거리도 되지 못할 그런 수많은 평범한 엄마들이 될 수 없는. 그렇게 되어 버리는.
그래도 여전히 아이를 걱정해주는 어른들이 있었다. 아이가 실종되고 적극적으로 아이가 학대당한 사실을 알리고 무어라도 아이를 위해 해보려 발벗고 나서는 선생님이 있었다. 뒤늦게나마 아이의 입장에서 아이를 위해 무언가 해 줄 수 있었지 않을까 고민하는 경찰과 아이를 위해 끝까지 진실을 밝히려는 형사도 있었다. 그 또한 드라마의 이면이다. 수진이 아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다. 수진 혼자서 싸울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하긴 마지막에 수진이 기대려 한 것도 그같은 인간의 선의였다. 구원일까. 어둡지만 그래서 희망을 가져본다.
'드라마'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냥 사랑하는 사이 - 삶이란 선과 정의, 그냥 살아가는 것에 대해 (0) | 2018.01.31 |
---|---|
그냥 사랑하는 사이 - 그냥 사랑하기 위한 조건, 삶이란 이유 (0) | 2018.01.30 |
마더 - 방치되는 아동학대, 참을 수 없는 답답함 (0) | 2018.01.25 |
그냥 사랑하는 사이 - 아직도 풀지 못한 매듭, '사랑해!' (0) | 2018.01.24 |
그냥 사랑하는 사이 -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가장 필요한 그것 (0) | 2018.0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