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네 탓이 아니다. 내 잘못이 아니다. 모든 것은 그런 짓을 저지른 가해자의 잘못이다. 자기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가해자가 오로지 나쁜 마음을 먹고 자신을 저항할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아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이다. 가해자가 모든 책임감과 죄책감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성범죄에서 가해자의 처벌이 중요한 것이다. 사실상 그것 밖에는 방법이 없으니까. 아무래도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이 남성을 위한 수단이자 도구로 여겨지는 문화에서. 따라서 여성은 자신의 존재와 가치마저 남성중심의 사회와 문화에 맡겨야만 한다. 혹시나 내가 잘못한 것은 없는지. 내가 실수한 것은 없는지. 그러니까 그때 내가 더 잘해야 했던 것은 아닌지. 다름아닌 공권력이 범인을 잡고 그 죄를 물어 엄격하게 처벌한다. 오로지 범인에게 죄를 물어 법으로 제재를 가한다. 그러니 네 잘못이 아니다.
물론 어찌되었거나 자기가 겪은 사실이니까. 아주 어렸을 적 어두운 밤길에서 술취한 남자에게 맞았던 일을 나 역시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내가 겪어야 했던 고통들, 수모들, 굴욕들, 내게 상처가 되는 모든 것들을 다름아닌 나의 기억이기에 나는 아직도 떠올리며 불편해하고는 한다. 그래서 상처다. 그래서 그놈들이 나쁜 놈들인 것이다. 내게 상처를 입혔으니까. 상처입은 자신이 잘못된 것도 아니고, 그럼에도 그 상처로 괴로워하지 않는 것이 잘못된 것도 아니다. 그냥 그런 일도 있었다. 그래서 아파했고 여전히 상처도 남았지만 그러나 어느 상처나 그렇듯 어느새 상처는 흔적만 남고 아물게 된다. 자매들도 언젠가 그렇게 될 수 있을까?
그런데도 어째서 많은 여성들이 성범죄의 피해를 입고 다시 그로 인해 평생을 상처와 고통속에 신음하며 살아야만 하는 것인가. 어쩌면 전혀 상관없는 한 마디에도 위로를 받는다. 다시는 그런 피해자가 없도록 하겠다. 다시는 범죄의 피해로 고통받는 이들이 없게끔 최선을 다하겠다. 어쩌면 경찰로서 너무 당연한 다짐일 수 있지만 같은 피해자 입장에서 그런 한 마디가 무척 든든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누군가 자신과 같은 처지의 이들을 그저 올곧게 지켜주려 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현실에는 그다지 많지 않으니까.
당장 가족들부터 돌아선다. 나름대로 피해자를 위한다고는 하는데 그 위하는 방식이 피해자를 탓하는 것이다. 왜 그랬는가. 왜 그러지 않았는가. 너의 잘못이다. 네가 잘못해서 그런 일이 생긴 것이다. 심지어 피해사실 자체를 부끄러워하며 숨기려는 사람들마저 있다. 당연히 경찰에 신고해서 범인을 잡고 신고해야 하는데 그렇게라도 알려지는 자체를 창피해하며 피해자에게도 침묵을 강요한다. 네가 당한 일은 그만큼 다른 사람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수치스러운 일이다. 여기에 기껏 가해자를 잡았는데 돈을 대가로 합의라도 한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아직도 저개발사회에 남아있는 명예살인이란 그래서 그리 먼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직접 자기 손으로 목숨을 끊지 않을 뿐 다른 사람도 아닌 가족이 피해자를 인격적으로 살해하는 경우는 일상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경찰이나 주변사람들로 인한 2차피해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누군가 자신의 편이 되어 주고 있다. 오로지 자신의 편에서 자신을 걱정하고 위해주고 있다. 아무도 믿을 수 없었다. 심지어 엄마조차 믿고 의지할 수 없었다. 아빠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자신과 같은 처지에서, 자신과 직접 눈을 마주하며 자신을 위한 이야기들을 해주고 있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12년 전 한정오도 그런 식으로 안장미(배종옥 분)에게서 위로와 구원을 받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도 아무렇지 않게 남에게 하지 못할 고민을 털어놓고 상담을 받는다. 단 한 사람 자신이 오로지 솔직해질 수 있는 누군가인 것이다. 그렇게 한정오도 혼자가 아니었기에 평범하게 자신이 당한 일들을 지난 상처로 기억으로 남겨둘 수 있었다.
피해자는 남자가 아니다. 단지 성범죄자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는 불특정한 남자가 아닌 악의를 가지고 자신을 노리고 못된 짓을 한 범인에게 당한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더 중요했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여전히 남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남자와 멋진 사랑도 하고 싶어한다. 무엇이 성범죄 피해자들을 더 큰 고통으로 끔찍한 2차피해로 내몰고 있는 것인가. 다름아닌 경찰이기에. 그 피해자와 범인들과 직접 마주하고 있는 입장이기에. 하지만 경찰에 의한 2차피해도 그동안 적지 않았었다. 피해자를 탓하며 피해자를 책임을 묻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던 경찰들이 적지 않았었다. 그래도 조금은 나아진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경찰의 사명감이란 것이다. 사실 모든 직업이 그렇다. 내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려 한다. 그 보상에 대한 것이다. 그로 인한 결과에 대한 것이다. 다른 말로 보람이라 한다. 그리고 그와 반대되는 모멸감과 수치심이다. 다시는 내 책임 아래에서 이런 일을 겪지 않겠다. 이런 일들을 겪게끔 하지 않겠다. 하지만 현실이 그런가. 막 경찰로서의 사명감에 눈떠가는 염상수(이광수 분)와 사명감만 쫓을 수 없는 현실의 문제에 고민하는 강남일(이시언 분) 그렇게 대비된다. 경찰로서의 사명감만을 쫓다가 이혼당할 처지에 놓인 오양촌(배성우 분)도 있다. 뺀질거린다며 강남일을 싫어하던 삼보 역시 그런 현실의 고민 만큼은 인정하고 이해해주려 한다. 그렇게 경찰은 사명감과 현실 속에 존재하는 그냥 개인들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일로 고민하고 갈등하고 걱정하고 후회하면서도 그러나 그들은 사건을 쫓는다. 가족과 다투고 그로 인해 속상해 하면서 그들은 범죄를 저지른 용의자를 쫓아 정신없이 헤매 다닌다. 여느 수사드라마에서와 같은 멋드러진 장면은 없다. 지겹도록 전단을 붙이고 발로 뛰어 증거를 찾는 지루한 노동만이 있을 뿐이다. 방안에 앉아서 단서 몇 개로 범인을 잡아내는 추리물같은 것은 소설이나 영화 속에나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다시 자신의 개인적 고민에 빠져들기도 한다.
여전히 죽은 연인을 잊지 못하는 최명호(신동욱 분)가 어쩌면 한정오에게 부대낄지도 모르겠다. 죽은 사람과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경쟁해야 한다. 염상수가 하필 한정오 앞에서 제법 멋진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었다. 아직은 젊기 때문이다. 사랑도 하고 그로 인해 고민도 하고 상처도 받고. 여느 젊은 남녀들처럼. 오양촌에게 아버지와 자식들의 문제가 현실의 고민으로 다가오듯.
가족을 지키지 못한 가장과 스스로를 지킬 수 없었던 엄마, 그리고 그 아래에서 스스로 보호받기를 포기했던 자매, 또한 사회의 주변에서 호시탐탐 그런 약자들만을 노리는 또다른 약자들이 있다. 강해서 저지르는 범죄는 또 유형이 전혀 다르다. 지구대란 그런 강자를 상대하는 곳이 아니다. 항상 무겁다. 내가 사는 현실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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