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친애하는 판사님께 - 양아치 한강호가 할 수 있는 것, 법원이 하지 못하는 것

까칠부 2018. 8. 11. 07:07

아무래도 한국사회에서는 대부분의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려는 경향이 강하다. 이를테면 정부의 여러 복지정책들도 기본적으로 자력구제와 재가복지를 그 원칙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일단 개인이 먼저 알아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하고 그 뒤에 정부가 나서서 어쩔 수 없는 최소한의 부분들만 돕는다. 물론 얼마전부터 그같은 경향은 국민의 요구에 의해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중이다.


당연히 대학 역시 학생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이어야 할 것이다. 필요한 자질과 역량을 가진 학생을 입시를 통해 걸러냈으면 그 다음은 대학이 알아서 필요한 내용들을 자체 시스템을 통해 가르치면 되는 것이다. 사실 대부분 세계의 대학들은 그같은 구조를 갖추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알아서 모든 것을 다 배워서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아니라 중등교육까지는 최소한의 기본적인 교육만을 받고 대학교육을 대학에서 알아서 커리큘럼을 짜서 진행한다. 어차피 고등학교에 다니는 모두가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고등학교 교육마저 대학을 위해 존재해서는 안된다. 대학에 가더라도 각자 전공이 다를 수 있다.


놀이공원에도 여러 종류의 손님들이 찾을 수 있다. 그 가운데는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도 있을 수 있다. 그러면 고객인 시각장애인에게 만일의 상황을 대비한 준비와 훈련을 갖출 것을 요구해야 하는가. 아니면 놀이공원 측에서 굳이 시각장애인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손님들이 만일의 상황에 최대한 안전하게 대피하고 구조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춰야 할 것인가. 나 역시 안경을 벗으면 바로 코앞에 있는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놀이공원의 주요 고객 가운데 하나인 어린이들은 그같은 만일의 상황에서 이성적인 판단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 장애인이니까 장애인이 알아서 준비를 갖출 수 있도록 사전에 교육을 받아야 한다. 이 얼마나 편의주의적인 발상인가. 고소공포증이 있는 송소영을 한수호는 최대한 인내심을 가지고 천천히 아래로 유도하고 있었다.


내가 편하기 위해서다. 나라의 주인이 국민이게 된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정부가 주인이었고 권력이 주인이었다. 기업은 상품을 만들어주고 서비스를 제공해주며 나라경제를 이끌어가는 시장의 주인이었다. 국민은 그들의 눈치를 보며 그들의 요구에 맞춰 자신을 다듬고 단련할 의무가 있었다. 그들이 바라는 국민이 되어야 했고 고객이 되어야 했다. 최소한 사회에서 소수라 불리는 이들은 더 그래야 했다. 심지어 장애인들이 생존을 위해 시위하는 것마저 비장애인의 기준에 맞추라. 비장애인의 시각에 맞추라.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 되고 소비자가 시장의 주인이 된 뒤에도 소수자인 장애인 만큼은 대우도 평가도 달랐다.


한수호가 아닌 양아치 한강호기 할 수 있는 일이다. 고소공포증이라면 롤러코스터에서 시각장애인 만큼이나 난감한 상황이다. 그런데도 한강호는 최대한 송소은을 안심시키면서 그를 안전하게 아래로 이끌 수 있다. 하다못해 한수호같은 양아치고 가능한 일인데. 과연 어쩌다 있을 시각장애인을 따로 교육시키는 것과 직원들을 혹시 모를 시각장애인을 위해 대비하여 교육시키는 것 가운데 어느쪽이 더 합리적이고 더 효율적일까. 하지만 어차피 시각장애인 몇 찾아오지 않는다고 놀이공원에 피해가 돌아가는 것은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 따로 교육을 받기 싫으면 아예 놀러오지도 말라. 모두가 보는 앞에서 시각장애인임을 말하며 따로 교육받을 것을 강요한다. 그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것인가.


설마 싶었는데 의외의 부분에서 진지하다. 그리고 한강호의 캐릭터처럼 일반 대중의 눈높에서 법조계와 기업, 아니 어쩌면 우리 사회 전체를 비판한다. 차라리 시각장애인인 소녀는 체념하고 있었다. 시각장애인인 자기의 잘못이다. 무조건 자신을 감싸려는 엄마의 잘못이다. 딸을 위해서 엄마는 세상과 부딪히며 전과만 몇 개나 가지게 되었다. 단지 이 사회의 다수와 다르다는 이유로 다수의 규칙을 강요하며 소수를 범죄자로 만드는 이 사회가 과연 옳은가. 이대로도 과연 괜찮은가. 그래도 여유가 있는 다수가 강자가 소수를 배려하는 편이 더 옳지 않겠는가. 판사는 그래도 이 사회에서 강자에 속한다.


마음껏 판사로서의 지위와 권한을 이용한다. 그러면서 정작 법정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검사와 변호사와 싸우고 있다. 너무나 현실적이다. 정치사회면을 보고 있으면 오히려 드라마가 판사와 검사들에 대해 미화하고 있구나 생각하게 된다. 법을 배웠다는 이유로. 남들보다 어려운 시험을 통과해서 남들과 다른 신분을 가지게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검사가 사건의 증거마저 제출하지 않고 있다. 수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 판사 역시 제대로 판결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한강호는 판사가 아니니까. 송소은 역시 아직 정식판사가 아니다. 변호사야 원래 그러는 것이 그들의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판사와 검사가 그래서는 안되는 것 아니던가. 그들의 권위주의와 특권의식을 외부인인 한강호를 통해 마음껏 조롱한다. 이 개자식들아! 한강호같은 양아치가 판사노릇을 해도 너희들보다는 더 잘 할 수 있다. 물론 송소은이 있어서 가능한 것이기는 하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어머니가 문제였다 말하고 있는 것이다. 평소 어머니가 한강호를 따로 차별하거나 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면 어쩌면 대화로 풀 수 있었던 문제였을 것이다. 사전에 한강호와 충분히 상의를 하고 동의를 구하려 했다면 당사자에게 그렇게 큰 상처로까지 남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그냥 호적상으로만 후손없는 친척의 양자로 들어간다. 양자로 들어가서 자식이 없어 하지 못하는 일들만 대신한다. 후사가 중요했던 전통사회에서는 일상으로 일어났던 일들이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한강호 모르게 일방적으로 결정했고 더구나 한수호는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평소 어머니가 보여 온 행동들에 비추어 한강호가 느낀 감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단지 한강호가 성급했다 어머니를 오해했다 일방적으로 비난만 할 수 있을까?


어머니를 원망할 수 없으니 더욱 형제인 한수호를 원망하게 된다. 그리고 그같은 한강호의 반발과 원망은 한수호와의 사이도 악화시킬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부모니까. 어머니니까. 차라리 자식이 그런 어머니에 맞춰야만 한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학대들로부터도 그래서 부모의 손에서 정작 아이들을 구하는 것조차 법과 제도가 앞장서서 막고 있기도 하다. 자격이 없는 부모도 물론 부모다. 하지만 자격없는 부모가 자식을 잘못 기르는 것도 그저 부모의 책임이고 권리이니 그냥 지켜만 보고 있어야 하는 것인가. 한강호를 철저히 양아치로 범죄자로 만든 것은 과연 누구였을까.


역시나 이유영은 예쁘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순수한 천연의 소녀를 연기해 보이고 있다. 때로 세상을 다 산 사람 같은 원숙함을 보이다가도 이런 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다. 힘이 들어가기는 했지만 윤시윤은 확실하게 드라마를 중심에서 이끌어가고 있다. 두 사람이 주인공이다. 드라마가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