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 이완익의 집에서 마주선 두 여인

까칠부 2018. 8. 12. 10:25

순수한 사랑마저 허락되지 않는다. 하기는 세상이 평화로웠다고 뭐가 다를까. 조선에 아무 일도 없었다면 고애신은 할아버지가 정한대로 정혼자와 혼인해서 누군가의 아내로. 혹은 누군가의 어머니로 이름없는 삶을 살았을지 모른다. 규방 애기씨가 타국의 거친 군인을 만나 얽힐 수 있었던 것부터 시대가 그만큼 빠르게 바뀌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그것을 유진도 안다. 이해한다.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끝까지 타인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자신이 없다. 고애신이 짊어져야 할 무게다. 조선의 고루한 인습마저도, 명문 고가의 일원이라는 굴레마저도, 무엇보다 조선이 놓인 풍전등화의 위기까지 모두가. 유진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 모든 것들과 싸워야 한다. 유진이 떠난다 하는데 바로 뒤쫓지 못하는 이유도 그녀에게 지워진 사명 때문이었다. 유진을 잡지 못하게 만드는 그 모든 것들이 자신이 지켜야 하는 것들이었다. 지키고자 하는 것들이었다.


그것을 담담하게 솔직하게 유진 앞에서 털어놓는다. 자신이 놓인 신분과 지금도 자신을 옭매고 있는 굴레와 그럼에도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자신의 한계에 대해서. 그것은 오히려 유진이 아닌 자신을 향한 넋두리였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유진과는 사랑할 수 없다. 떠나고자 하는 유진을 잡을 수 없다. 이해했고 그래서 유진은 한 발 뒤로 물러난다. 오로지 자신과의 사람만을 위해 잡기에는 그녀는 너무나 고결한 인간이다. 설사 자신을 선택했어도 그로 인해 평생 씻을 수 없는 죄를 끌어안고 고통속에 살게 될 것이다. 어떤 이들은 너무 순수해서 스치는 바람에도 스스로 상처입고 평생을 괴로움 속에 살기도 한다.


다행히 김희성은 고애신의 약혼자였다. 고애신과 대등한 그래도 조선에서 손꼽하는 부호의 자손이었다. 김희성이라면 아무리 고애신의 주위에 머물러도 흠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고애신을 가장 가까이서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지 모른다. 운명과 현실이 그 순간 미묘하게 엇갈린다. 김희성이 사용한 수단은 돈이다. 자신의 지위와 명성이다. 약혼자라는 위치다. 그리고 그런 김희성의 존재가 지금 고애신에게 필요한 그늘이 울타리가 되어 주고 있다. 물론 그것은 오로지 고애신이라는 한 여성에 대한 순수한 호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유진도, 김희성도, 당연히 구동매 역시 누구 하나 고애신의 길을 함께 가려 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눈은 참 상징적이다. 그리고 김희성이 전세내었던 전차 역시. 유진과의 길은 눈이 녹아 진창에 미끄러운 반면 김희성과의 길은 승객 하나 없이 여유롭고 평화롭다.


구동매와 쿠도 히나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가 꽤나 미묘하다. 분명 구동매와 쿠도 히나 둘 다 전혀 다른 사람을 보고 있다. 전혀 다른 상대를 사랑하고 있다. 하긴 고애신과 유진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동안 구동매와 쿠도 히나는 같은 방향을 보며 함께 걷고 있었다. 그것이 전부인지 모르겠다. 서로 마주본 채로는 총을 겨누는, 그러나 어깨를 맡기고는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서로 볼 것 다 보고 알 것 다 아는 어쩌면 동지와도 같은 관계였을까? 누구보다 서로를 믿으면서 그 만큼 누구보다 서로를 불신한다. 그리고 언젠가 그들은 과연 누구에게 기대어 남은 시간을 보내게 될까? 격동의 시대에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다면.


여자들이 무섭다. 남자들은 죄다 식물인데 여자들은 총에 칼에 정말 살벌하다. 칼잡이인 구동매조차 저렇게 사나운 싸움을 벌이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이완익의 집이다. 히나에게는 아버지이고 고애신에게는 조직의 명령으로 찾은 매국노의 집이다. 자신의 비밀을 찾고 나라를 지킬 단서를 찾는다. 서로 총과 칼을 들고 겨눈 채 정체를 드러낸다. 너무 감질난다. 더운 여름 날 시식코너에서 냉면 한 모금 먹고 난 뒤의 답답함과 같다. 언제 저 냉면을 사다가 끓여서 이처럼 시원하게 만들어 먹을 것인가. 더운 여름에 불 앞에서 냉면을 삶는 자체가 고문이다. 하루를 견디는 자체가 고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여러 이유로 사연으로 얽혀왔던 두 여인이었다. 서로 다른 이유와 사연을 가지고 그들은 사선처럼 서로의 총과 칼끝에 서 있다.


고애신을 감당할 수 없어 유진은 스스로 떠나려 한다. 김희성은 그럼에도 그런 고애신을 어떻게든 자기 힘으로 가까이서 지켜주려 한다. 구동매는 지켜본다. 조선을 일본에 넘기려는 이완익의 음모는 집요하고 악랄하다. 어느새 유진에게까지 이완익의 악의가 닿으려 하고 있다. 사람은 떠나려 하지만 시대는 그마저 허락하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으려 해도 사람의 마음이 그마저 허락하지 않는다. 시대가 운명을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