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그것이 수다다. 수다의 핵심을 짚는다.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것이 아니다. 반드시 필요하고 가치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하고 싶고 해야 할 것 같아서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냥 내가 즐겁고 듣는 사람이 즐겁다. 그래서 알쓸신잡이 아닌가. 화자의 의도가 넘치면 그 의도를 헤아리느라 더이상 이야기가 재미없어진다.
어쩌면 그림에 대한 출연자들의 견해가 바로 이 프로그램의 정체성을 말해주고 있을 것이다. 어려운 양자역학보다 전혀 의외의 밀리터리 이야기에 흥미가 끌리는 것처럼. 복잡한 건축의 이론보다 건축가의 소소한 삶들에 더 마음이 끌리는 것처럼. 그리고 지금 여기 있는 자신의 입장에서 과거의 사실들을, 사람들을 보려 한다. 때로 과장되게, 때로 왜곡되게, 때로 더하거나 혹은 빼가면서.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보고 생각하고 전하려 하는 그것이다. 그래서 이야기는 재미있다.
말하는데 거침이 없는 이유다. 듣기도 잘 듣지만 끼어들기도 잘 끼어든다. 주체할 수 없을 테니까. 마치 랜지 위의 냄비처럼 주체할 수 없이 끓어올라 넘칠 것만 같다. 때로 진지하기도 하고 때로 사소하기도 하다. 이런 이야기들도 하는구나. 그러면서 이야기는 수준이 높다. 아, 나도 이런 이야기들을 술마시며 나누고 싶다. 어느새 정신없이 떠들다 보면 미로처럼 그리고 어느 광장에 모이게 된다. 모든 것이 모이는 광장이다.
어째서 가짜뉴스는 그리 빨리 퍼지는가. 그리 쉽게 사람들이 믿고 마는가. 원근법이 어떻게 세계를 바꾸고 역사를 바꾸었는가. 한 마디로 객관화다. 세계를 객관화하여 보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똑같이 옮겨 그린다. 관념이 아니다. 관습이나 관성이 아니다. 그로부터 과학이 시작되고 근대문명이 나타나게 된다. 근대유럽의 역사는 바로 이 원근법과 함께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의 감정은 이성과 논리로만 재단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와 숭배가 절정에 이르던 19세기에 그에 대한 반동으로 낭만주의가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전의 무지에 의한 감정이나 충동과는 다른 새로운 동기이고 열정이었다.
아무튼 인문학에 밝은 사람들이니 고대와 중세의 이탈리아 도시와 만나면 하고 싶은 말들이 차고도 넘칠 것이다. 근대 유럽의 문명은 거의 이탈리아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과학과 예술과 철학과 모든 인문학이 르네상스의 이탈리아에 기대고 있었다. 새로운 인류역사의 시작이다. 질투날 정도로. 너무 익숙한 이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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