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지금 장면들이 전회에 나왔으면 더 나았을 것이다. 아예 사족따위 다 무시한 채 유진우는 게임속으로 모습을 감추고 현실에서는 자기 논리대로 모든 것이 알아서 해결되었다. 사실 유진우가 엠마를 밀어내고 돌아와서 한 일이란 것도 차병준이 차형석의 망령에게 죽는 빌미를 준 것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유진우가 의도한 것이 아니라 그저 우연히 일어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유진우가 없어도 되었지 않았는가.
유진우가 게임속으로 숨고 정희주가 게임을 통해 유진우를 찾으러 가는 과정도 괜찮았을 것이다. 차형석처럼 엠마에게 버그로 삭제되고 게임데이터로 복사되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정세주가 말한 것처럼 게임의 시스템에 의해 현실 아닌 어딘가에 도피해 있을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 유진우가 정세주를 돌아오게 했다면 정희주도 유진우를 돌아오게 할 수 있었다. 그보다 기다리지 않고 직접 게임 속으로 유진우를 만나러 들어갈 수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게임속 어느 곳에 모습을 감추기보다 차형석처럼 망령이 되어 그럼에도 정희주와 함께하는 쪽이 더 드라마의 의도에 맞아떨어지지 않았을까.
처음 드라마에 이끌린 것은 증강현실이라는 독특한 소재와 더불어 죽여도 죽여도 끊임없이 쫓아오는 차형석의 망령이 주는 공포 때문이었다. 어디에 숨어도 어디로 도망쳐도 끝까지 쫓아와 자신을 죽이려 하는 차형석의 존재가 유진우가 느끼는 만큼 시청자에게도 압박과 공포를 느끼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게임에 의해 사람이 죽고 다시 망령으로 게임속에서 되살아나는 공포스런 상황이 어떻게든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한 압력으로 유진우와 함께 시청자마저 짓누르게 된다. 알함브라 궁전의 지하감옥에서 진행되던 퀘스트에 시청자 또한 함께 강한 압박과 긴장을 느끼던 이유였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문제는 결국 현실과 게임 사이의 밸런스 조정 실패에 있었을 것이다. 간과했다. 어떻게 해도 현실이 우위에 있다. 아무리 게임이 재미있고 중요해도 현실보다 우선할 수는 없다. 어느 순간 현실의 문제가 게임의 긴장감을 넘어서 버렸다. 현실에 얽히고설킨 악의가 게임의 상황으로 인한 압박과 공포마저 넘어서 버렸다. 유진우의 레벨이 90레벨이 넘고 100레벨에 이르면서, 심지어 게임개발사의 전대표라는 지위를 이용해서 치트에 가까운 아이템까지 독점해 사용하면서 더이상 게임의 상황은 시청자에게 위기로 여겨지지 않게 되었다. 그보다 당장 현실의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그 순간 게임은 잊혀진다. 아마 작가 자신도 게임에 대해 잊은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니까 남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진우는 게임을 빠져나와야 했다. 그것이 문제였다. 유진우는 마지막까지 게임 안에서 게임을 통해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렇게 굳이 사족까지 잔뜩 붙여가며 한참을 끌고 유진우를 사라지게 했음에도 그 뒤의 이야기가 또 그 만큼이나 길었다는 것이다. 과정이 길었는데 이후도 길다. 유진우가 사라지기까지 과정도 지겨울 정도였는데 사라지고 난 뒤의 내용도 알맹이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없어도 그만이다. 그냥 적당히 잘랐어도 상관없었을 이야기들이다. 그나마도 태반이 회상이었다. 전회도 그랬다. 전전회도 그랬다. 이쯤 되면 그냥 시청자를 가지고 놀겠다는 의도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소재가 너무 작가에게 버거웠든, 아니면 원래 작가의 역량 자체가 그것밖에 안되었든 나와서는 안 될 드라마가 만들어지고 말았다.
마지막까지 볼까 말까 망설였었다. 솔직히 집중해서 보지도 않았다. 그 순간 나도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냥 게임 하는 틈틈이 흘끔거리며 봐도 전혀 이해하는데 무리가 없었다. 개연성같은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원래 그런 것을 기대할만한 소재도 장르도 아니다. 그래도 마지막회까지 지켜봤는데 아무거라도 보상이라 할 만한 것이 있어야 하지 않은가. 드라마를 끝까지 봤다는 보람이 있어야 한다. 시간만 너무 아깝다.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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