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로맨스는 별책부록 - 비로소 깨어난 꿈, 돌아온 초년생을 위해

까칠부 2019. 2. 3. 12:16

비로소 꿈에서 깨어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진짜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초년생일 뿐. 계약직 신입사원일 뿐. 자기 아이디어를 도둑맞아도 누구도 편들어주지 않는다. 원래 사회란 그런 것이다.


아마 알았을 것이다. 모를 수 없다. 그러나 잊고 있었다. 그래도 결혼하기 전까지 자기의 일에서 상당한 성취를 이룬 바 있었다. 다시 사회로 복귀해서도 자신이 이룬 그 성취가 그대로 이어질 것이라 생각했었다. 모두가 알아줄 것이라고. 자기 실력만 증명해 보이면 모두가 인정해 줄 것이라고. 그러나 그래봐야 이제 갓 사회로 첫 발을 딛은 다른 신입사원과 다르지 않은 그저 나이만 더 많은 사회초년생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현실이며 그나마 그동안 가지고 있던 기대와 미련이 꿈에 지나지 않았다.


오히려 주인공 차은호와 강단이의 로맨스보다 더 흥미를 잡아끄는 부분이다. 드라마다운 디테일로 이른바 경단녀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결혼 전 아무리 잘나갔어도, 아이를 낳고 살림만 하기 전까지 아무리 대단한 성취를 이루었어도, 그러나 자기가 가진 실력이나 경력들과는 상관없이 그저 시간에 떠밀려 나이만 먹어버린 무지렁이가 되어 버린다. 자기가 가진 무엇도 인정받지 못하고, 따라서 자기가 하고자 하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그들에게 허락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단순하고 가치가 떨어지는 일들 뿐이다. 


한국사회에서 심각한 출산률 저하와도 아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결혼 자체를 꺼려하는 경우가 많다. 남성이든 여성이다. 남성은 과도한 가부장적인 책임으로 인해, 여성은 여전히 남아 있는 가부장적 억압에 대한 거부감으로. 여성이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존중받는 것은 오로지 결혼하기 전까지의 짧은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으면 여성의 사회적 가치는 급격히 추락한다. 그것을 누구보다 여성들 자신이 잘 알고 있다. 주변의 다른 여성들을 보면서 너무나 잘 깨닫고 있다. 그런데 일을 통해 성취를 얻고자 하는 여성이 자신의 가치를 떨어뜨릴 수 있는 결혼이란 선택을 하려 할까?


같은 여성들까지 적으로 돌아선다. 많은 젊은 남성들이 젊은 여성들을 향해 강한 적대감을 드러내는 이유와 같다. 절박하니까. 밀어내야 할 적이다. 쓰러뜨려야 할 경쟁자다. 전혀 자기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 여기면 드라마의 남성들처럼 허튼 선의 정도는 베풀 수 있을지 모른다. 그만큼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이었고 더 독하고 악해져야만 했다. 그나마 자유로운 분위기의 출판사라 다행이다. 남성이 남성을 이기고 올라가는 것도 쉽지 않은데 여성이 남성의 위에 선다는 것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런데 혹은 그 싸움을 포기하고 집안에만 들어앉았던 누군가가 다시 기어나와 자신과 같은 전장에 서려 한다. 때로 가소롭고 때로 괘씸하다. 그나마 아직은 위협이 되지 않기에 가지는 감정이다.


차은호의 강단이에 대한 감정은 그냥 그러려니 한다. 내가 관심을 가질 부분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첫사랑이 있고 첫사랑에 대한 아련함이 있다. 평생을 지나도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 첫사랑의 기억이고, 때로는 그 기억이 감정으로 함께 남아 있기도 한다. 뭐 첫사랑의 기억을 잊지 못해 평생 홀로 살다 죽는 이들도 적지 않고 보면. 잊으려 아무리 발버둥쳐도 결국 남는 것은 그 첫사랑에 대한 선명한 감정이라면. 그저 무심한 강단이가 원망스러울 뿐. 아무것도 모르고 어느것도 알려 하지 않는다.


그림이 예쁘다. 무엇보다 궁상맞을 정도로 현실과 닿은 이야기가 매력적이다. 판타지를 제하더라도 과연 돌아온 초년생으로서 강단이는 어떻게 회사에서 살아남을 것인가. 다시 사회인으로 설 수 있을 것인가. 때로는 현실에서도 꿈은 필요하다. 아쉬운 부분들은 잠시 잊는다. 좋으면 좋은 것이다. 드라마는 재미있으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