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로맨스는 별책부록 - 바로 지금 여기, 다시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

까칠부 2019. 2. 4. 06:00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지금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혼자만 멈춰서 있었다. 세상 모두가 쉼없이 달리는 동안 자기만 아이 낳고 살림한다고 오랜동안 멈춰 있었다.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다. 어리기만 한 다른 신입사원들처럼 자기 역시 어느새 낯설어진 세상에 다시 내던져진 초년생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부터 시작이다.

 

사람은 언제 늙을까? 언제부터 도태되기 시작할까?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면서부터다. 앞으로에 대한 불안한 기대와 희망보다 이미 지나온 시간들의 아름답고 화려한 기억들에 더 사로잡히게 되면서다. 아주 사소한 것이더라도 이미 지난 성공에 사로잡혀 더이상 앞으로 나가려 하지 않는다. 흔히 그런 것을 두고 꼰대라 부른다. 아주 먼 과거의 기억속에 살며 현재도 미래도 주변조차 돌아보지 않는다. 그의 시계는 자기가 추억하고픈 과거에만 멈춰 있다.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다. 현재를, 그리고 미래를 살아가기 위해서다. 멈춰서기에는 아직 젊지 않은가. 이대로 주저앉기에는 너무나 하고 싶은 일들이 많다.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들부터. 내가 해야만 하는 일들부터. 그러니까 당장 지금 여기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가장 소중하고 가장 절실한 것이 무엇인가? 굳이 먼 길을 돌아온 깨달음과 같은 것이다. 이름보다 소중하고, 나이보다 중요하고, 직업보다도 더 절실한 것이 있다. 아니 그런 것들은 어쩌면 너무 사소하다. 함께 어울려 라면을 끓여먹고 사소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의미없지만 소중한 시간들을 보낸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굳이 사족처럼 덧붙이는 본능적 욕망은 자신에 대한 해방선언이기도 하다. 나는 나의 것이다. 나의 몸도 나의 욕망도 온전히 나에 속하는 것이다.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역시나 경단녀 강단이의 성장이 눈에 띈다. 그만큼 마음고생을 많이 했으니까. 그만큼 힘들고 고단한 시간들을 보냈을 테니까. 실망도 하고 좌절도 하고 그러면서 무력감도 느껴보고, 그런데 그런 건 처음 사회에 첫발을 내딛으면서 누구나 한 번은 느끼게 되는 것 아니던가. 어느새 무뎌지고 덤덤해진다. 원래 세상은 그런 것이겠거니. 다시 그런 세상에 익숙해지려 한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들부터 하나씩 해내려 한다. 지난 과거는 과거일 뿐 현재는 결코 과거가 될 수 없고, 미래 또한 과거가 대신할 수 없다. 지금 여기 있는 것은 지금의 자신일 뿐이다. 얼마든지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의지와 용기가 살아있음을 실감하게 만든다. 아마도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살아갈 이유가 되어 주는 누군가 때문이 아닐까. 포기할 수조차 없게 만드는 절실함과 절박함이다.

 

아니나다를까 어이없이 오해가 겹치고 인연들이 쌓여간다. 딱 오해하기 좋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어느새 오해는 기정사실이 되어 간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둘 새로운 인연들이 더해진다. 아무렇지 않게. 전혀 대수로울 것 없이. 그런 자연스러움이 로맨스라는 드라마를 만든다. 그냥 사람들이 좋은 탓이다. 그래서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의식하지 않은 채 인연을 만들고 그리고 오로지 선의로써 오해를 더해간다. 그래도 상관없다 여기는 것은 진심으로 서로가 행복해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여전히 첫사랑에 집착하고 있는 차은호 입장에서는 복장터질 일이겠지만. 이 여자는 아직도 자신의 진심따위 전혀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래도 소재가 되고 배경이 되니 출판계의 어려운 현실도 양념처럼 슬쩍 전해준다. 그나마 2쇄라도 찍을 수 있으면 대성공이다. 그렇다고 초판을 너무 적게 찍을 수도 없다. 한 번에 일정 이상 필수적으로 찍어내야 차라리 비용을 아낄 수 있다. 그래서 팔리지 않으면 모두 드라마에서처럼 폐지로 전락하고 만다. 다른 이유와 사정으로 서점으로부터 반품되는 책들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그나마 누군가에게 읽히기는 했으니 세상에 나온 값은 했다 할 수 있지 않을까. 출판사 입장에서는 눈물나는 이야기겠지만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처지에 재정적인 부담까지 더해진다. 하긴 책을 사놓고도 시간없다는 핑계로 쌓아만 두고 있는 내가 할 말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시간없다는 핑계로 최근 책을 수집만 하는 중이다.

 

때로는 현실처럼, 그러나 결국은 판타지이기에. 그러기에는 사람들이 너무 좋다. 출판사 겨루의 사람들도, 그 과정에서 만나고 어울리게 되는 수많은 사람들도 역시. 아직 딱히 악역이라 할 만한 사람은 안 보이는 것 같다. 다만 차은호와 겨루 사장이 감추고 있는 비밀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은 생긴다. 차은호는 강단이에게 돌아오기 전 어디를 홀로 찾아갔다 온 것일까? 다시 돌아와 아무도 모르게 훔쳐보는 사랑하는 사람처럼. 그래서 드라마는 달콤하다. 굳이 단 과자와 사탕을 찾는 이유는 현실에 없는 달콤함이기 때문이다. 혀가 아릴 정도의 달콤함은 아니다. 은은하면서 끌리는 단맛이다. 아직은 재미있다. 아직은. 의심만 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