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나 버티기 힘들다. 사실과 다른 것도 어느 정도지 이래서야 조선이라는 이름마저 기만으로 여겨질 정도다. 그래도 최소한 조선이라는 이름을 쓰는 이상 어느 정도 실제의 조선을 연상할만한 부분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관복을 제외하고 실제의 역사와 연결지을만한 부분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왕이란 성리학의 질서에서 누구도 감히 침범해서는 안되는 절대의 권위라 할 수 있었다. 조선의 왕권이 약했다고 흔히들 알고 있지만 그러나 정작 조선의 역대 국왕들 가운데 진심으로 하고자 하는 일이 있음에도 힘이 없어 하지 못한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했었다. 단지 조선의 국학인 성리학의 수호자이자 실천자로써, 성리학을 따르는 사대부의 으뜸으로써 성리학의 윤리와 도덕을 직접 실천하고자 했던 모습들이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을 뿐이다. 당장 지지기반이 취약해서 조정을 장악한 노론에 휘둘리던 경종마저 한 번 분노하자 그대로 대부분 노론의 중신들이 쓸려나갔을 정도였다. 존재감도 미미하던 철종 역시 한 번 분노하면 전횡을 일삼던 장김들마저 긴장하기 일쑤였다.
다시 말해 누군가 그런 왕권에 도전한다는 것은 제발 자기는 물론 일가친척까지 모조리 죽여달라는 간청과도 같은 것이었다. 왕에게는 그럴 수 있는 충분한 명분이 있었고, 제발 그 명분을 자기들에게 쥐어주기를 바라는 여러 정파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누구에게 힘을 실어주느냐에 따라 조정의 판도가 바뀌고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가기도 한다. 조선 전기에는 그것을 사화라 불렀고, 중기에는 옥사라 불렀으며, 후기에는 환국이라 불렀다. 그때 왕명 하나에 죽어간 이들 가운데 명신이 없었고 권신이 없었을까? 심지어 세도정치의 끝에 아직 어린 고종이 즉위했을 때 어린 임금을 등에 업고 흥선대원군이 단호하게 나서자 그대로 조정의 지형이 바뀌었을 정도였다. 당시도 장동 김씨가 척신으로써 조정을 장악하고 전권을 휘두르고 있었음에도 왕을 등에 업은 흥선대원군이 결심하자 도리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이후 여흥 민씨가 조정을 장악하는 과정 역시 오로지 왕인 고종의 결심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런데 하물며 조선 초기를 제외하고 명분이나 실력에 있어 가장 최고조에 이르렀던 숙종 앞에서 감히 신하에 지나지 않는 노론이 감히 왕의 아들을 제쳐두고 먼 방계의 왕족을 후계로 거론한다? 그리고 그 방계의 왕족은 스스로 왕위를 입에 올리고 있었다.
심지어 장차 왕위를 물려받게 될 세자조차 스스로 왕위를 입에 올리는 순간 역모로 몰려 탄핵당할 수 있었다. 그래서 왕이 왕위를 물려주겠다 직접 자기 입으로 말해도 세자는 신하로서 그럴 수 없다며 거부해야 하는 것이다. 아예 궁에 멍석을 깔고 제발 철회해달라 간청해야 하는 것이다. 왕의 아들이며 당연하게 왕위를 물려받을 세자조차 감히 왕위를 넘보는 말이나 행동을 보여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하물며 전전대에 왕명에 의해 죄인이 되어 처벌받은 왕족의 후손이었다. 증조할아버지대에 갈라졌으니 왕위계승을 말하기에도 한참 먼 방계인 것이다. 아니었다면 밀풍군이 그토록 대우받으며 살 수 있을 리 없었다. 왕위계승에 가깝다는 것은 왕권에 위협이 된다는 뜻이고 따라서 왕의 감시 아래 단 한 순간도 마음편히 지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왕위계승과 한참 거리가 멀기에 불행한 일을 겪은 할아버지의 형제의 후손들에게 인정을 베풀 수도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밀풍군이 스스로 왕위를 입에 올리고 대신들마저 함부로 대하고 있다. 다른 왕도 아닌 다름아닌 숙종 앞에서.
무엇보다 노론을 마치 악의 온상인 양 여기며 적대하는 연잉군부터가 노론이었다. 어머니 숙빈 최씨가 노론의 지원을 받았고, 노론과 손잡고 장희빈을 탄핵하기도 했었다. 노론에 의해 비호받으며 이제 갓 즉위한 경종의 왕세제로 책봉되기도 했었다. 영조의 탕평도 그런 노론을 등에 업은 조정권력의 재편이었지 당색을 완전히 배제한 것이 아니었다. 조선역사와 관련해서 몇 줄만 읽었어도 알 수 있는 사실을 깡그리 무시한다. 아마도 왕권과 신권의 대립이라는 한국 사극의 클리셰를 너무 강하게 의식한 때문이 아닌가 한다. 노론은 악이어야 하고 그런 노론에 맞서 왕권을 강화하는 것이야 말로 조선의 왕들에게 있어 숙원이자 시대의 소명이어야 한다. 그래야 사극이고 그래야 시청자가 본다. 하긴 그동안 그렇게 성공한 역사드라마가 너무 많았었다.
감히 왕족의 몸에 손을 댄다. 이인좌의 난과 연루되어 반란군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던 밀풍군도 영조에 의해 자진을 명령받고 있었다. 왕족은 고문도 당하지 않는다. 당연히 오라에 묶여 끌려가는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아무리 죄를 지었어도 왕족의 몸에 손을 대는 순간 대역죄인이 될 수 있다. 사헌부 장령도 나서기 전에 일개 다모가 그런 왕족의 몸에 손을 댔다. 당연히 고아라는 다모보다는 한참 높을 테니까. 배우 고아라와 극중 다모를 혼동한 모양이다. 하긴 경종조차 나오지 않는다. 태어나서 돌도 되기 전에 원자로 책봉되어 세자가 되었을 경종이 아예 보이지 않는다. 왕위를 이을 세자마저 지워버린 마당에야. 그런데도 과연 끝까지 참고 지켜봐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냥 판타지겠거니. 그냥 창작이겠거니. 실제의 역사와 전혀 상관이 없다. 실제의 조선과 전혀 아무 연관도 없다. 그러나 그것도 정도가 있다. 조선이라서 문제다. 숙종과 연잉군이라서 문제다. 밀풍군이라서 문제다. 실제의 역사와 너무 닮아 문제다. 너무 닮았는데 그러나 정작 전혀 닮지 않았다. 그것이 끝까지 부대끼며 불편하게 만든다. 재미 이전에 당장 공감하며 보기 어렵다. 그나마 젊은 박문수가 한량으로 묘사된 것은 역사와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실제의 박문수 역시 젊었을 적 불우한 현실을 비관해서 방황한 적이 있었다. 그것 말고는 없다. 과연 역사드라마로서 이 드라마를 봐야 할 어떤 가치나 의미가 있는가. 단 한 시간 반의 시간조차 아까워지는 이유다. 재미가 전부가 아니다. 안타깝게도 한국 역사드라마에는 통하지 않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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