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녹두꽃 - 백이현의 절망과 좌절, 백이강이 선택한 길

까칠부 2019. 5. 12. 07:27

누구를 위한 군대인가? 누구를 위한 싸움인가? 전근대 왕조시대의 군대란 곧 군주의 사병과 같았다. 왕을 위해 살고 왕을 위해 죽으며 왕을 위해 왕의 적과 싸운다. 그를 위해서라면 힘없는 백성이라도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 아니 대부분 외적이나 내부의 반란군이 아니면 군주의 군대가 싸워야 할 대상은 백성이었을 터다.


하긴 이미 군주의 창칼이 되어 백성들 앞에 선 순간 병사들은 더이상 그들과 같은 처지가 아니었을 터다. 자신들의 뒤에는 나라의 주인인 군주가 있고 자신들의 손에는 백성들을 벨 수 있는 무기가 있다. 구한말 가장 백성들을 괴롭힌 것은 자기 군대를 키우겠다고 백성들을 쥐어짜던 황제 고종과 그의 명령에 따라 저항하는 백성들을 무참히 학살하며 약탈을 일삼던 그의 군대였었다. 사실 그리 오래된 이야기도 아니다. 당장 40년도 채 되지 않은 멀지 않은 과거 군은 권력을 위해 기꺼이 같은 국민들에 총을 겨누고 기관총사격까지 하고 있었다.강간과 고문과 학살이 무수히 저질러지고 있었다. 그런 과거를 아직도 반성도 사과도 않고 있는 군관계 인사들이 오히려 더 많을 정도다. 군이란 과연 국민을 위한 것인가. 군의 싸움이란 과연 국민을 위한 것인가.


무너져간다. 어쩌면 황석주나 백이현이나 근본부터 속절없이 허물어져가던 조선이라는 사회를 보여주기 위한 캐릭터였는지 모른다. 양반이었다. 선비였다. 지난 수 백 년간 조선사회를 지배해 온 신분으로서 절대 꺾이거나 더럽혀져서는 안되는 절조와 신념이라는 것이 있었다. 임금을 생각하고 나라를 생각하고 백성을 생각하며 양반이며 선비로서 자신에게 지워진 책임과 의무를 다하려 한다. 임금과 나라와 백성과 무엇보다 가문과 자신의 이름을 위한 모든 노력을 마지막까지 다하려 한다. 그렇게 믿었을 것이다. 그래서 주변에 명사로서 크게 이름도 얻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모진 고통에 끝내 꺾이면서 그는 잔혹한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아니 그마저도 회피하려 한다. 자신은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니며 자신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선비로서의 절조도 기개도, 더구나 양반으로서의 명성과 체면마저도 지킬 수 없는 나약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타락이란 쉽다. 아무리 깊은 상처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낫게 된다. 죽지만 않으면 굳이 치료같은 것 하지 않아도 어떻게든 사람은 살게 되어 있다. 하지만 그 상처를 끊임없이 의식하고 그에 자신을 맞추려 하는 순간 영원히 상처는 자신의 일부가 되어 버린다.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그로 인한 비겁함까지 받아들인다. 결국 자신은 그런 존재인 것이다. 그것밖에 안되는 존재인 것이다. 자기를 학대하며 멸시하는 사람보다 무서운 것은 없다. 바닥을 알지 못한다. 그 바닥 그 아래에 자신은 존재한다. 타락한 지금의 자신이야 말로 진짜 자신의 모습일 터다. 모든 모멸과 수치야 말로 자신에게 어울리는 것일 터다.


하필 바로 그 1980년의 이야기가 한바탕 이슈가 되고 난 뒤였던 터라. 많은 이들이 그렇게 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잔혹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꺾이고 부서졌었다. 마음대로 죽지조차 못했던 것은 그마저 또다른 조작을 위해 이용하는 비열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은 이들을 위해서라도 끝까지 살아남아 저들을 위해 자신을 굽혀야만 했었다. 고문 과정에서의 수치와 모욕에 더해 그 고문에 굴복했다는 치욕과 모멸이 남는다. 그럼에도 한 편으로 어떤 이들은 다시 일어났었다. 당시를 떠올리는 것조차 치를 떨면서도 어느새 다시 일어나 그 두렵기만 한 싸움에 자신을 던질 수 있었다.


그래서 묻지 않았었다. 그래서 아무도 그들에게 따로 따지거나 묻지 않았었다. 왜 자백했냐고. 왜 그런 자술서를 썼느냐고. 그로 인해 자기가 잡혀갔다고. 자기와 친구들이 잡혀가서 고통을 받았노라고. 다시 일어서면 된다. 다시 일어서서 싸울 수 있으면 된다. 그러는 동안 지난 과거의 수치와 모욕은 사라진다. 미움도 원망도 사라진다. 치유하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자신들은 여전히 살아남아 저들과의 싸움을 계속할 수 있었다. 잠시 꺾였을 뿐 완전히 부러진 것은 아니다. 어차피 사람은 누구나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잠시의 약함이 그의 전부를 정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은 행동이다. 이후 어떤 행동을 보이는가 하는 것이다. 그로 인해 완전히 부러지고 부서졌는가. 꺾였지만 다시 기우고 이어서 일어설 수 있었는가.


한 번도 그런 고통같은 건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고난이나, 그런 절망과 좌절 같은 것은 겪어 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막연히 생각했었다. 선비로서의 자신을. 개화된 문명을 받아들인 지식인으로서의 자신을. 하지만 고문이라는 가혹한 육체적 고통 아래서 그는 단지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전장이라는 난폭하고 잔인한 환경에서 자신은 그저 겁먹은 어린 놈에 지나지 않았다. 당장 살 것만 걱정하고 당장 자기가 먹고 입을 것을 걱정해야 한다. 그를 위해 기꺼이 다른 이를 공격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빼앗을 수 있다. 죽은 군관의 시신에서 자신의 총을 돌려받고, 자신이 살기 위해 탈영한 같은 향병의 목을 벤 순간 깨달았을 것이다. 진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더구나 믿었던 스승인 황석주로부터 배신까지 당했다. 장차 자신의 처형이 될 황석주가 자신을 죽음으로 내몬 당사자였다.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까지 많은 지식인들이 겪었던 과정들이기도 하다. 현실의 곤란과 불리함이 양반으로서의 지조마저 꺾게 만들었다. 과연 왕에 대한 충성을 그토록 강조하던 양반들 가운데 왕조와 목숨을 함께 한 이가 몇이나 되던가. 일본이 가진 문명의 힘에 도취되었던 만큼 일본이 가진 폭력의 두려움에 쉽게 꺾이며 그들의 앞잡이로 전락하고 있었다. 그러고보면 백이현이 전봉준 앞에서 말했던 문명에 대한 예찬도 그 연장선상에 있을지 모른다. 생각이 너무 많다. 아무런 다른 생각 없이 백이강은 그저 눈앞에 있는 자신의 문제에만 집중한다. 살아야 하고 인정받아야 한다. 그 원초적인 욕망에 비해 백이현의 욕망은 너무 높고 멀다. 추상적이다. 당장의 현실의 문제와 맞닥뜨려 쉽게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 육체를 가진 인간은 현실에서밖에 살아갈 수 없다. 이상은 너무 높고 현실은 너무 멀다. 멀기만 한 현실이 당장 고통이 되고 공포가 되어 자신을 지배하게 된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에 아직 순결한 그들의 정신은 너무 약하다.


아마 백이강 이현 두 형제의 아버지 백가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어떻게 인간은 타락하고, 어떻게 인간은 자신을 잃어가는가. 조선이라는 이미 망해가는 나라에서 그나마 나라를 위한다던 지배층의 정신적 타락이 민란과 전장이라는 가혹한 환경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된다. 그렇게 꺾이고 그렇게 부서지며 그렇게 끝내 자신마저 부정하게 된다. 윤시윤의 연기는 원래 괜찮았었다. 어떻게 백이현이라는 한 인간이 타락하고 망가져가는가. 그것이 어떻게 현실로써 그려질 수 있는가. 그럼에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발버둥이 더 처절하게 더 잔혹하게 뒤엉키며 보여진다. 인간이란 이렇게 슬프고 약한 존재다. 그 약함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더 약해지고 악해지는 존재인 것이다. 인간은 원래 악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약한 것이다.


과연 전장의 묘사가 처절하다. 원래 한국 영화나 드라마의 액션연출은 그 치열함에서 인정받을 만하다. 끊임없이 싸움이 벌어진다. 더럽고 추하고 슬프고 안타까운. 살기 위한 몸부림과 그만큼이 강렬한 상대를 죽이고자 하는 적의가 거친 화면을 통해 날숨처럼 전해진다. 하긴 그런 전장이니 백이현은 자신을 끊임없이 잃어가는 것일 터다. 반면 그런 전장이기에 백이강은 오히려 자신을 찾아가고 있다. 불편한 손을 대신할 무기까지 손에 넣었다.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와는 맞지 않는다. 몸을 내던져 나뒹굴 때 그곳에서 그는 자기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된다. 다른 많은 백성들처럼. 진흙구덩이야 말로 원래 그들이 살던 곳이다.


역사를 통해 어떻게 입바른 소리를 하던 지식인들이 스스로 타락하고 변절해갔는가를 보아 왔기 때문에. 문득 떠올리고 만 것이었다. 황석주의 위선과 백이현의 원망에서. 그럼에도 그것은 자신들의 탓이 아니다. 누군가 다른 대상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만 한다. 원망과 증오는 그들의 힘이다. 안타깝게도. 인간이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