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녹두꽃 - 끝까지 비겁한 백이현, 그리고 살아남은 이들의 싸움

까칠부 2019. 7. 14. 07:18

마지막회를 보기 전 어쩌면 백이현을 죽이는 것은 황명심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반만 맞았다. 아니 어쩌면 더 잔인했을지 모른다. 아예 말로 모든 희망을 잘라 버렸다. 그래도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그래도 바뀔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아니다. 백이현은 이미 죽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오니라고 하는 괴물 뿐이다.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에 온갖 죄악을 저지른 추물일 뿐이다.


결국 백이현은 마지막 순간까지 비겁했다. 말은 쉬웠다. 더이상 거시기가 아닌 백이강으로 살라.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백이강이 기울인 노력은 정말 눈물겨울 정도였다. 차라리 전봉준의 칼에 손등이 꿰뚫린 정도는 사소해 보일 지경이었다. 매순간 그동안 자신이 저지른 죄와 마주하면서도 단 한 번도 외면하거나 도망치려 하지 않았었다. 자책하며 자기연민에 빠지거나 쉽게 말로 하는 사과에 기대려고도 하지 않았었다. 그저 욕하면 듣고 때리면 맞고 용서하고 인정해 줄 때까지 묵묵히 자기 자리에서 행동으로 보여줄 뿐이었다. 그것은 백이강으로 살기 위해 지난날의 거시기를 스스로 죽이는 과정이었다.


백이현을 죽일 수 있다면 오니를 죽이지 못할 것은 무엇인가. 다시 백이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니를 죽이고 다른 자신으로 거듭나면 되는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하든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바를 행동으로 보여주고 인정받으면 되는 것이다. 물론 영원히 인정받지 못할 수 있다. 용서받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바란다는 자체가 아직 진심이 아니라는 뜻이다. 상대야 인정하든 말든 용서하든 말든 그런 것은 상대에게 맡기고 자신은 그저 자기가 할 바만을 다한다. 그래서 업인 것이다. 업이란 책임이자 의무다. 당연히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며 치러야 하는 대가인 것이다.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비난과 원망조차 자신이 치러야 할 대가인 것이다. 그런데도 황명심의 말 몇 마디에 지레 절망해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만다.


조선을 문명화시켜야 한다 말하지 않았었는가. 조선을 일본과 같은 문명국으로 만들어야 한다 다짐하지 않았었는가. 친일파라고 비난받는 이들 가운데도 정작 일본으로부터 받은 자신의 지위와 힘을 같은 조선인을 보호하는데 썼던 이들도 적지 않았었다. 식민지로 전락했지만 조선과 조선인의 현실을 조금이라도 낫게 바꾸고자 불철주야 노력한 이들도 상당했었다.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아프고 서글픈 부분일 것이다. 한국의 근대화에 있어 친일파를 제외하면 이야기할 것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차라리 오명을 뒤집어쓰더라도 그동안 자신의 죄업의 대가로 일본으로부터 받은 신임을 이미 정해지다시피 한 조선과 조선인의 미래를 위해 쓸 생각은 왜 하지 못한 것일까. 백이현이 아닌 오니라면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본으로부터 적지 않은 조선의 백성들을 지켜줄 수 있을 지 몰랐다. 도저히 견디기 힘들 것 같으면 기왕 죽을 것 자신의 머리를 향한 그 총으로 일본 공사든 아니면 다케다든 아무라도 데리고 함께 가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그러고도 여전히 매국노라 욕먹는다면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결과이니 기꺼이 받아들일 밖에.


하지만 당장 일본과 싸우기보다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원망과 비난을 받아들일 용기가 없었다. 사람들이 자기를 향해 무어라 말하든, 자신을 향해 어떤 욕설과 저주를 퍼붓는, 그렇기 때문에 그마저 감수해가며 새롭게 자신의 길을 위해 싸워나갈 의지가 없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일본의 문명에 기대려 했던 것이었다. 바닥에서부터 하나씩 싸우며 부숴나갈 의지와 용기가 없었다. 불가능하게만 보이는 그것을 부딪히고 또 부딪혀서 작은 균열이라도 내고자 하는 집요함 또한 없었다. 그래서 도련님인 것이다. 처음 인상 그대로 일관적이다. 이미 많은 시련과 고난을 겪어 왔지만 그럼에도 그는 조금도 성장하지 않았었다. 전봉준을 만나고 그의 싸움을 함께하며 부쩍 성장한 모습을 보이는 백이강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더이상 누구도 거시기라 기억하지 않으며 이미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자신의 싸움을 이어나가는 백이강에 비해 백이현의 시간은 그 순간에 멈춰 버리고 말았다. 그토록 치욕스러운 오니란 이름 그대로.


청일전쟁도, 시모노세키조약도, 삼국간섭도 그저 역사의 한 과정일 뿐이다. 일본과의 싸움에서 만난 사소한 인연 역시 마찬가지다. 하나의 죽음에도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간다. 결국에 모두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싸움을 이어간다. 그동안 오라비 황진사와 백이현의 뒤에 가려져 있던 황명심 역시 이제는 당당히 자신의 길 위에 서려 한다. 어떤 순간에도 절망하여 주저앉지 않는 그런 낙천과 용기야 말로 수많은 녹두꽃들의 힘이 아닐까. 아들이야 말로 자신의 모든 것이었기 때문에. 다시는 자신의 이름을 되찾을 수 없을 것이란 사실로 인해. 목숨은 살았어도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죽여버린 이들은 또 얼마나 많았었을까. 자신의 양심과 자신의 존엄과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부정하며 지워버린 이들은 또 얼마나 많았었을까. 하지만 그들에 비해서도 백이현의 마지막은 너무 비겁하고 비루하게 여겨진다. 그들은 최소한 자신과 가족이라도 지켜낼 수 있었다.


정작 싸우지 않으면 더 큰 피해는 막아도 정작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할 지 모른다는 이유인 것이다. 송봉길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백이현과 아버지 백가가 치러야 했던 대가다. 여전히 백이강은 당당하다. 송자인도 황명심도 여유롭다. 새삼 확인한다. 백이현이 황진사를 죽인 것은 단지 짜증이 아니었을까. 버들을 죽일 때처럼 그저 보기 싫은 것을 눈앞에서 치우려는 투정이 아니었을까. 인간의 나약함에 대해서. 그것을 오히려 이성으로 냉정함으로 현명함으로 치장하려는 비겁함과 비열함에 대해서. 어째서 역사에는, 그리고 현실에는 이토록 백이현들이 많은 것인가. 그럼에도 백이강 또한 어째서 이토록 많은 것이다.


어쩌면 한국 근대사의 명암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본의 노골적인 침략과정에서 어느새 민중으로서 민족적인 각성을 이루게 된 이들과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 일본의 힘에 겁먹고 그들을 내면화하려 했던 또한 많은 개인들의 나약함에 대해서. 그들의 존재가 조선을 지켰고 또한 지키지 못했었다. 그래도 백이강이 살아남았다. 백이강이 남아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아마 지금도 어딘가에서 싸우고 있을 것이다. 단 하나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