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회

일본과의 경제전쟁, 그리고 사라진 거대서사

까칠부 2019. 8. 14. 18:28

1980년대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거대서사가 강했다. 내가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빠져든 이유였다. 일본의 만화가, 애니메이터들이 만들어낸 때로 불안하고 불길하기까지 한 세계와 이야기들이 나를 매혹시킨 때문이었다. 어지간하면 유치하다며 다시 보지 않는 수많은 만화와 애니메이션 가운데 그래서 당시의 작품들은 지금도 감탄하며 보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며 더 깊이 즐기기도 한다.


그러면 언제부터 나는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 등에 거리를 두게 되었을까. 윗 문단에 그 이유가 있다. 나름 작가는 굉장히 고민해서 진지하게 쓴 대사들이 내게는 그저 우습게만 들리기 시작한다. 차라리 '내 청춘에 러브코미디는 잘못됐다'나 '케이온'같은 사변적인 이야기들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데 거대서사에 이르면 이건 중2병도 아니고 골방에서 망상에 사로잡혀 쓴 듯한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다. 하긴 대부분은 만화를 보며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 세대들일 테니까.


이전에도 여러 경로로 비슷한 표현을 쓰고는 했었다. 만화를 보면서 만화를 그린다.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애니메이션을 만든다. 그렇다 보니 관성적인 디테일은 강한데 정작 작품 밖의 현실세계의 인간과 서사에 대한 이해는 빈약하다. 그것을 가장 강하게 느낀 작가가 바로 클램프였었다. 처음에는 뭔가 그럴싸했는데 보면 볼수록 이게 뭔가 싶은 설정과 전개가 넘쳐난다. 그냥 오타쿠들이 자기 좋아할 이야기들만을 쓰는구나. 그 세계에 갇혀서 보면 그럴싸하지만 한 걸음만 벗어나도 그냥 뇌내망상수준이다. 팬들이 본다면 미안. 하지만 내가 더이상 클램프의 작품을 보지 않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전후세대들에게 전쟁이란 현실이었다. 전후의 폐허와 혼란을 경험하고 그래서 자신들이 사는 세계의 미래에 대해 고민했던 세대들에게 사람이 살아가는 세계란 더없이 치열한 현실 그 자체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고민을 안고 학생운동에 투신했던 이들이나 혹은 그들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 오갈데 없어지면 그나마 장벽이 낮은 대중예술계로 진출하고는 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학생운동하던 이들이 대중예술로 진로를 정한 것처럼 그들도 혹은 연극으로, 혹은 영화로, 드라마로, 소설로, 만화로, 애니메이션으로 생업을 위해 다른 길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었다. 미야자키 하야오나 다카하타 이사오는 우리나라로 치면 그냥 빨갱이들이다. 작품만 봐도 그렇다. 토미노 요시유키나 야스히코 요시카즈 같은 이들도 비슷한 세대들이다. 그래서 그들이 만든 세계는 지금 봐도 여전히 리얼할 수밖에 없다. 이미 그만한 고민이 내면에 축적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세대들에게 세계란, 특히 만화나 애니메이션 같은 창작물에서 단지 유희에 지나지 않았었다. 그래서 기괴하고 자극적인 현실과 동떨어진 설정들이 넘쳐나게 되었다. 역시 한 걸음만 벗어나면 그 허점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상당히 진지하고 심각한데 그래서 그 논리의 모순들이 두 어 걸음 떨어져 보면 적나라하게 드러나 보이게 된다. 아마 내가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흥미를 잃기 시작한 시기와 더이상 일본 영화나 드라마를 보지 않게 된 시기가 비슷했을 것이다. 차라리 그런 되도 않는 거대서사보다는 사변적인 이야기들이 더 흥미롭고 매혹적이다. 여전히 그런 개인의 이야기들은 충분히 흥미를 끌만큼 재미있다. 


문득 최근 일본의 도발로 시작된 경제전쟁을 보면서 떠오르는 생각들이다. 이른바 단카이 세대라 불리우는 이전의 세대와 80년대와 90년대를 성장기로 보낸 이후의 세대들의 세계에 대한 생각은 전혀 다르다. 오히려 구세대들이 더 진보적이며 그래서 아시아와 세계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에 비하면 이후의 세대들은 더 호전적이고 더 배타적이다. 어디서 이런 차이가 벌어지는가. 그러니까 이제 더이상 유치해서 일본에서 생산된 거대서사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것과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들이 전쟁을 말한다. 전쟁할 수 있는 보통국가를 이야기한다. 전쟁이란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군이란 얼마나 낭비적인 조직인지. 그로 인해 사회가 감당해야 할 부담과 나아가 세계적인 영향이란 어떤 것인지. 심지어 한국과 경제전쟁을 하게 되면 미치게 될 영향들에 대해서까지 무지하거나 무관심하다. 사다모토 요시유키도 어린 나이는 아니긴 한데 역시 풍요가 익숙해진 시대에 속할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보다도 한 세대 전의 구닥다리들부터 소환했던 것이다. 풍요가 얼마나 쉽게 과거의 비극을 망각하게 만드는가. 고민조차 잊게 만드는가.


다나카 요시키는 상상력이 결여된 세대라 비판했었는데. 하다못해 현실의 세계에 대해 제대로 상상력이라도 발휘할 수 있었더라면. 그런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반면교사로 삼을 부분이다. 아직까지 한국의 대부분 젊은 세대들은 현실에 대한 고민이 많다. 그래서 고민하고 갈등하고 대립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가는 중이다. 미래가 있다면 바로 그런 점들에 있지 않을까. 새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시기가 참 엄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