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위대한 쇼 - 반전, 승부수, 다정의 결정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

까칠부 2019. 9. 11. 07:11

이타란 결국 이기다. 그냥 내가 편한 것이다. 내가 보기 좋은 것이다. 그래서 상대를 내가 바라는대로 이끌고 만들려 한다. 자신이 아닌 오로지 상대를 위해서. 그런 점에서 위대한은 얼마나 솔직한가. 다정을 위해 결정을 내리는 와중에도 자신을 위한 계산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미 결정은 내려진 뒤일 것이다.

 

사람은 대부분 이유가 있어 행동하기보다 먼저 행동하고 나서 이유를 찾는 경우가 많다. 사람의 행동을 지배하는 것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직은 충동과 본능인 것이다. 인간 역시 신경의 지배를 받는 여러 동물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렇게 먼저 행동으로 옮기고 난 뒤 이유를 찾는다는 것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일 것이다. 그것을 흔히 사람들은 이성이라 말하고는 한다.

 

도저히 설득될 것 같지 않은 다정의 진심과 마주한 순간 위대한 역시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자신의 의지로는 어찌할 수 없는 다정과 남자친구의 맑고 옭곧은 진심을 마주한 순간 오히려 위대한은 설득당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인정할 수 없었다. 그동안 자신이 보고 듣고 배우고 겪어온 상식에 비추어서, 무엇보다 정치인으로서 재기를 꿈꾸는 자신의 현실을 고려해서 과연 옳다고 그들의 진심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그 진심을 받아들이고 과연 자신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지만 도저히 더이상 거부하지도 부정하지도 못할 다정의 진심은 끝내 그로 하여금 그 이유를 찾아내도록 만든다. 어떻게 그런 결정을 내리고 받아들여야 하는 자신을 납득시킬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런 자신을 위한 변명은 세상을 위한 변명이 되기도 한다. 자신에게 들려주듯 세상을 향해 그 변명을 들려주려 한다. 그러므로 자신은 설사 자신에게 불리할지라도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을 받아들이겠다. 자신을 설득하기 위한 변명보다 더 간절하고 절실한 것이 있을까? 능숙한 정치인의 언어가 진심보다 더 진심처럼 사람들의 마음까지 헤집어 놓는다.

 

어른들의 오만이다. 하긴 불과 한 세기 전까지만 해도 다정이 나이면 벌써 결혼도 하고 애엄마가 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상투도 틀고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 처자식을 책임질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문명의 발전 만큼이나 배워야 할 것도 알아야 할 것도 많은 요즘의 청소년들이기는 하지만 지능까지 불과 한 세기 사이 크게 퇴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보화시대는 그들로 하여금 예전보다 더 깊고 더 넓은 사고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아니 설사 아직 어리고 그래서 그 생각과 판단이 어리석고 부족하다 할지라도 그마저 응원하고 지지하며 잘못된 선택이 되지 않게 옆에서 도와주는 것이 어른의 역할이기도 한 것이다. 진심으로 각오하고 결심을 굳혔다면 이제 어른의 역할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으로, 자신의 실력으로 그를 가까이서 적극 돕는 것이어야 한다.

 

부모가 자식을 지배하려 해서는 안된다. 소유하려 해서도 안된다. 부모에게는 자식이지만 이미 한 사람의 독립된 인격이기도 한 것이다. 아직 미숙하다면 성숙할 때까지 기다려 줄 수 있어야 한다. 아직 미숙하다고 자식이 번 돈을 부모가 마음대로 쓰려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자식의 미래는 자식의 것이지 부모의 것이 아니다. 설사 실패해도, 그로 인해 상처입고 좌절하더라도, 그래서 때로 후회하고 포기하는 날이 올지라도, 그마저도 온전히 자식의 몫일 뿐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곁에서 지키며 그를 돕고 지탱해 주는 것이 전부다. 가장 힘든 일이다. 차라리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강요하고 강제하는 편이 더 쉽고 편하다. 그래서 대부분 부모들은 자식의 삶까지 자신이 강제하려 한다.

 

오히려 타인이기 때문이다. 친부모와 친자식이 아닌 거리가 오히려 상대를 더욱 객관적으로 볼 수 있도록 해준다. 차라리 친자식이었다면 매를 들어서라도 자신의 생각을 강요했을 것이다. 차라리 인연을 끊어서라도 자신의 결정을 강제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나 미약한 관계였고 따라서 일정하게 타협하지 않으면 안되는 경계가 있었다. 그래서 그런 결정이 어떻게 자신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인가. 정치인으로서 자신에게 이익으로 돌아올 것인가. 그래서 더 쉽다. 서로서로 좋다. 온전히 다정의 삶을 자신이 모두 책임질 수는 없다. 너무 가까워서 문제일까? 너무 사랑해서 때로 상대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게 되기도 한다.

 

위기를 오히려 반전의 기회로 만든다. 패륜아라는 비난을 오히려 임대주택건설을 지지하는 자신의 입장을 강변하는 기회로 삼았듯, 자칫 불리할 수 있는 딸의 임신마저 자신의 진심을 알리고 국민아빠로서 사람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계기로 만들려 한다. 넘어져도 그냥 일어나지 않는다. 천생이 정치인이다. 거짓조차 진심으로 만든다. 가식조차 진실로 만들 줄 안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다정을 향한 그의 마음은 이미 진심이었다. 그 진심을 자기식대로 합리화하고 있을 뿐. 그래서 자신은 다정을 위한 결정을 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다정이 아닌 자신을 위한 것이다.

 

과연 정치인으로서 유권자가 요구하고 바란다면 온전히 그대로 따라야 하는가. 그러나 그럼에도 결국 주권자는 국민이며 정치의 주인은 유권자인 것이다. 인정해야 할 땐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 땐 받아들인다. 당연히 맞서야 할 때는 맞설 줄도 안다. 대세만을 쫓으며 양지만을 찾아들던 정치인 위대한이 스스로 위험도 무릅쓸 수 있게 되었다. 대중을 믿지만 한 편으로 믿지 않는다. 대중을 믿지 않지만 한 편으로 믿고 의지하는 것이 있다. 위대한과 다정 남매와의 관계가 그런 정치인과 유권자의 관계와 닮았다. 되바라지게 조숙한 다정 커플과 세상의 부딪힘은 아버지로서 위대한의 책임을 일깨 깨닫게 된다.

 

정치인의 진심과 정치인의 위선, 알지 못하는 동기와 이미 눈에 드러난 결과, 그러므로 위대한은 좋은 아버지인가? 그냥 계약자에 지나지 않는가. 그 모든 행동들이 설사 철저한 정치적 계산에 의한 것이라 할지라도. 때로 이기가 이타가 되고 이타가 이기가 되기도 한다. 그 경계를 보여준다. 무엇이 이타이고 무엇이 경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