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시에는 천재가 있어도 소설에는 천재가 없다고들 말한다. 시가 직관이라면 소설은 경험의 영역이다. 인간을 알고 세상을 알고 그 구조를 이해해야 소설을 쓸 수 있다. 시는 오히려 아이들이 더 직관적으로 쓸 수 있다.
양준일의 무대를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멜로디는 학습할 수 있지만 리듬은 천성적으로 타고 나야 한다. 의외로 심수봉의 음악을 들으면서도 들던 생각이었다. 아마 예전 내가 심수봉에 대해 썼던 글을 보았던 사람이라면 떠오르는 것이 있을 것이다. 청승맞은 트로트 멜로디 사이에 그를 더욱 단단하게 쪼개고 받쳐주는 특유의 리듬감이 있다. 심수봉의 노래를 그 특유의 리듬감 없이 편곡해 부른 것을 보면 더 분명히 드러난다. 그런데 꼭 경연프로그램에서 편곡할 때 보면 그러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게 문제.
아무튼 춤으로는 타고 난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보다 리듬감이 타고 났다. fantasy의 비트는 그야말로 최고다. 한참 듣고 나니 생각난다. 들었던 것 같다. 진짜 들었던 것 같거나 그만큼 짧은 시간 동안 내 무의식에서 익숙해져 있었거나. 절로 춤추고 싶어질 만큼 비트가 사람의 본능을 자극한다. 그런데 그것은 가나다라마바사나 dance with me 아가씨에서도 그랬었다. 저렇게까지 본능에 맡기면서도 무대를 꽉 채울 수 있는 재능을 가진 가수는 여자는 김완선 정도가 있지 않았을까. 안타깝게도 김완선에게는 작곡이나 편곡의 재능 같은 건 없었다.
천생 아티스트다. 다만 지금도 느끼는 거지만 시대를 잘못 타고나기는 했다. 당시 시대 분위기가 그렇지 못했으니. 한 3년 만 늦게 데뷔했어도 사정은 달랐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또 듀스가 뉴 잭 스윙을 유행시키고 나서도 대중음악의 무대란 상당히 경직된 느낌이 있었다. 정해진 틀을 벗어나지 않는 안무가 정석처럼 여겨지고 있었으니. 힙합스런 춤만이 춤이라 여기는 분위기도 있었고.
아무튼 양준일의 춤선이 잘 빠졌다 여겨지는 이유일 것이다. 노래를 부를 때도 소리와 소리 사이의 빈공간을 잘 채워야 하듯 가만히 서 있을 때도 마냥 가만히 서 있지 않는다. 몸으로 음악을 표현한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런 본능을 억누르고 그동안 미국에서 서빙을 하며 가족을 부양해 왔었다.
그야말로 드라마다. 바로 그 드라마가 사람들을 열광케 하는 것일 게다. 소년같은 어른.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처음 그대로의 순수를 간직한 듯한 나이만 들어버린 소년. 그리고 그곳에 시간을 잊은 듯한 그러나 가족과 일상을 소중히 여기는 생활인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가 보여주는 무대는 노래 제목처럼 판타지다.
처음 왜 사람들이 양준일에 열광하는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 동영상 몇 개 챙겨보고 비로소 느끼게 된다. 이런 것을 사람들이 바라는구나. 유명한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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